합천 백마산성
합천 백마산성 Baengmasanseong Fortress, Hapche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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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합천 백마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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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Baengmasanseong Fortress, Hapcheon |
한자 | 陜川 白馬山城 |
주소 | 경상남도 합천군 율곡면 항곡리 산3번지 외 4필지 |
지정(등록) 종목 | 경상남도 기념물 제263호 |
지정(등록)일 | 2006년 1월 12일 |
분류 | 유적건조물/정치국방/성/성곽 |
시대 | 가야 |
수량/면적 | 127,251㎡ |
웹사이트 | 합천 백마산성,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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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국문
백마산성은 백마산의 정상에 돌과 흙을 섞어 쌓은 성으로, 이곳은 황강의 흐름과 그 주변이 한눈에 들어와 적의 동태를 잘 파악 할 수 있다.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백제와 신라의 접경지로 접전이 치열했던 삼국시대에 쌓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성터 안에는 주춧돌을 가진 건물지와 우물이 있다. 성터에서 수습되는 토기나 기와 등의 유물로 보아 산성은 삼국시대에 처음 쌓았음을 알 수 있다. 자연 붕괴된 부분을 제외하고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있어, 삼국시대의 축성 양식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임진왜란 때는 이곳에 의병들이 주둔하면서 왜군과 격전을 치르기도 하였다.
영문
Baengmasanseong Fortress, Hapcheon
This fortress located at the peak of Baengmasan Mountain (246 m above sea level) is made of a mixture of soil and rock. Baengmasan Mountain has rugged slopes that supplement the fortress’s natural defenses and offers a panoramic view of the Hwanggang River that aids in observing enemy movement. There are no remaining historical records about this fortress, so the period of construction is unknown. However, based on ceramics and roof tiles found in the fortress, it is presumed to have been first constructed in the Three Kingdoms period (57 BCE-668 CE). Later, during the Japanese invasions of 1592-1598, this fortress was the venue of a major battle.
An archaeological survey conducted in 2008 identified one well and various building sites within the premises. Apart from natural deterioration over time, the fortress has maintained its original appearance, which is valuable in the study of the construction technology of the Three Kingdoms period.
영문 해설 내용
백마산(해발 246m) 정상부에 돌과 흙을 섞어 쌓은 성이다. 백마산은 험준한 절벽이 있어 천연요새를 이루며, 황강의 흐름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어 적의 동태를 파악하기가 쉬운 곳이다.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축성 시기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성터에서 출토된 토기와 기와 등의 연대로 보아 삼국시대에 처음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 때에는 이곳에서 왜군과의 격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2008년 지표조사가 실시되어 성터 안에서 우물 1기와 다수의 건물지가 발견되었다. 자연 붕괴된 부분을 제외하고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있어, 삼국시대의 축성 양식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참고자료
- 2008년-2009년에 지표조사가 실시되었음 ; 합천 백마산성 정밀지표조사보고서(경남연구원 역사문화센터) 있으나 확인 못함.(접근 불가)
- 지자체 제공 조사자 의견 중 -> 산성이 입지한 백마산은 산세가 말의 형태와 같이 앞은 험준한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뒤편은 경사가 완만하게 이루어져 있다. 성벽은 대부분 붕괴되었으나 일부 확인된 성벽은 막돌로 축성되었다. 일제강점기 조사에서 “잔존한 성벽이 정상 일부, 동쪽의 성문지, 남쪽 일부분 이다.”라고 하는데, 현재 남아있는 성벽은 길이 20m, 너비 3m, 높이 1m 내외만이 확인된다. 성 내부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주춧돌을 가진 건물지가 다수 확인되며, 3단 축대 상에서도 건물지를 조성한 흔적도 남아있다. 그리고 산성의 동쪽에는 우물, 초병동굴이 있다. 성내에서 수습되는 토기나 기와 등의 유물로 보아 초축은 삼국시대이며, 이후 계속 보수를 거쳐 고려시대까지 이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인공적인 파괴가 거의 없이 자연 붕괴된 부분을 제외하고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있다. (출처-한국고고학전문사전 성곽봉수편)
- 합천백마산성, 경남관광길잡이 문화재 DB http://tour.gyeongnam.go.kr/index.gyeong?menuCd=DOM_000009404005001000&no=11355&page_no=42&reurl=DOM_000009404005000000 -> 율곡면 백마산 정상부 해발 260m에 등고선 지형에 따라 축성되어 있다. 산성이 입지한 백마산은 산세가 말의 형태와 같이 앞은 험준한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뒤편은 경사가 완만하게 이루어져 있다. 근처에는 기리와 항곡리 마을이 있다. 산성의 동쪽 아래에는 황강과 그 건너 마을인 내천리가 보인다. 산성의 성벽은 대부분 붕괴되었으나 일부 확인된 성벽은 막돌로 축성되었다. 해방 전 이루어진 조사에서 잔존한 성벽이 정상 일부, 동쪽의 성문지, 남쪽 일부분 이다라고 하는데, 현재 남아있는 성벽은 길이 20m, 너비 3m, 높이 1m 내외만이 확인된다. 성 내부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주춧돌을 가진 건물지가 다수 확인되며 3단 축대상에서도 건물지를 조성한 흔적도 남아있다. 그리고 산성의 동쪽에는 우물, 초병동굴이 있다. 임란 당시 곽재우가 진지를 구축하고 내천리에 주둔하던 왜병과 격렬한 전투를 벌였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 합천 백마산성 복원 관광자원 활용해야, 부산일보, 2014.11.14. http://www.busan.com/view/busan/view.php?code=20141114000041 -> 백마산성은 삼국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며 경남도 기념물 제263호로 총 길이가 1.5㎞이며 면적이 12만㎡에 이르고 임진왜란 때는 의병들이 주둔하면서 왜군과 격전을 치렀던 산성이지만 현재는 성 윤곽만 남은 상태다.
- 우리지역 문화유적 소개 – 율곡면 백마산성과 오복동, 합천인터넷뉴스, 2012.4.17. http://m.hcinews.asia/view.asp?intNum=1504&ASection=001002 -> 임진왜란 당시 백마산성에는 명장(名將) 권율(權慄) 도원수가 진을 치고 있었고 황강 건너 내천(內川, 안천) 뒷산 못재에는 왜군이 진을 치고 있었다 한다. 백마산성은 전면(前面)은 대천(大川, 황강)이 가로막아 있고 좌우면(左右面)은 절벽으로 되어 있어 천연요새(天然要塞)를 이루고 있었지만 유일한 침투루트로 말꼬리 부분인 점골(點谷)쪽의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권율 장군은 성안의 주민들에게 왜군들이 혹시 성(城)이름을 묻거든 꼬리가 없는 백오성(白烏城, 흰까마귀성)이라고 가르쳐 주라고 했다. 그러나 어느날 황강변에서 빨래를 하던 노파가 변장한 왜군에게 속아 권율 장군의 명령(命令)을 깜박 잊고 평소 부르던 대로 백마성(白馬城)이라고 가르쳐 주고 말았다. 왜군들은 ‘옳구나’하고 난공불락(難攻不落)의 백마산성을 함락시킬 묘책을 찾았다며 산 능선이 순한 백마(白馬)의 꼬리 부분인 지금의 점골동네로 우회하여 야간에 기습적인 공격을 하니 권율 장군도 어떻게 할 수가 없어 성(城)을 빼앗기고 진주성으로 퇴각하고 말았다고 한다. 지금도 그때의 많은 유적이 남아 있는데 아군이 후퇴하며 빠져나간 ‘빼앗골’과 군사들의 훈련장인 ‘습전곡(習戰谷)’ 심한 가뭄에도 물이 넘쳐 군사들의 식수(食水)로 사용하던 ‘식수정(食水井)’, 아군의 패전병들이 모여 도적(盜賊)처럼 숨어서 성(城)을 탈환하기 위해 모의(謀議)했던 ‘도적곡(盜賊谷)과 당시 쌓았던 석축 등이 아직도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