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화산 신도비
2021년 국문집필
2017 국문
이 비는 조선의 문신인 화산 권주(權柱, 1457~1505)의 신도비이다. 권주는 자가 지경(支卿)이고 본관은 안동이다. 성종(成宗) 5년(1474) 진사(進士)가 되어, 1480년에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하였다. 연산군(燕山君) 3년(1497)에 도승지(都承旨)에 임명된 이후 충청도(忠淸道) 및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 예조참판(禮曹參判) 등을 역임한 후 중종(中宗) 때 의정부(議政府) 우참찬(右參贊)에 추증되었다.
이 비는 숙종(肅宗) 37년(1711)에 세워졌으며 전체 높이 1.45m, 폭 75cm, 두께 27cm이다. 장방형의 좌대(座臺) 위에 비신(碑身)과 용모양의 비머리(螭首)를 갖추었다. 비문(碑文)은 퇴계학파의 정통을 계승하고 숙종 때 이조참판(吏曹參判)을 지낸 남인의 대표적 인물인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이 짓고 김천도찰방(金泉道察訪)을 지낸 이유(李濰)가 썼다. 비각은 1981년 10월에 지은 것이다.
2021 국문
초고
신도비란 임금이나 벼슬이 높은 사람의 일생과 업적을 기록하여 세우는 비석으로, 대개 무덤 앞이나 무덤의 남동쪽에 세운다. 신도(神道)는 신(神)이 묘역에 이르는 길을 뜻한다.
화산 신도비는 조선시대의 학자이자 문신인 화산 권주(花山 權柱, 1457~1505)를 기리기 위해 숙종 37년(1711)에 세워졌다. 안동에서 태어난 권주는 성종 5년(1474)에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으나, 연산군 10년(1504) 사화(士禍)에 연루되어 파직되었고, 이듬해에 사약을 받아 생을 마쳤다.
이 신도비는 넓은 사각형 받침돌과 몸돌, 구름과 용으로 장식된 머릿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전체 높이는 1.45m이다. 비문은 이황(李滉, 1501~1570)의 학문을 정통으로 계승하며 경상도 지역을 대표하는 학자로 자리매김한 이현일(李玄逸, 1627~1704)이 지었고, 글씨는 이유(李濰, 1669~1742)가 썼다.
비석을 보호하고 있는 비각은 1981년에 지어졌다.
1차 수정
화산 신도비는 조선시대의 학자이자 문신인 화산 권주(花山 權柱, 1457~1505)를 기리기 위해 숙종 37년(1711)에 세워졌다. 신도비란 임금이나 벼슬이 높은 사람의 일생과 업적을 기록하여 세우는 비석으로, 대개 무덤 앞이나 무덤의 남동쪽에 세운다. 신도(神道)는 신(神)이 묘역에 이르는 길을 뜻한다.
안동에서 태어난 권주는 성종 5년(1474)에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승정원의 관직을 지내던 중인 성종 13년(1482)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받들고 갔는데, 이 때문에 연산군 10년(1504)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파직되고 이듬해 사약을 받아 생을 마쳤다.
화산 신도비는 넓은 사각형 받침돌, 몸돌, 구름과 용으로 장식된 머릿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전체 높이는 1.45m이다. 비문은 이황(李滉, 1501~1570)의 학문을 정통으로 계승하며 경상도 지역을 대표하는 학자로 자리매김한 이현일(李玄逸, 1627~1704)이 지었고, 글씨는 이유(李濰, 1669~1742)가 썼다. 비석을 보호하고 있는 비각은 1981년에 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