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안동권씨 송파재사
2022년 국문집필
초고
이 건물은 안동권씨 중시조인 10대손 권수홍(權守洪)의 묘단과 파조(派祖)인 15대손 권인(權靷)의 묘를 수호하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마련된 공간이다.
권인은 고려 공민왕 23년(1374) 과거에 급제했으며, 고려가 망한 후에는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안동으로 내려온 후 은거하며 절의를 지켰다고 한다.
조선 영조 19년(1743)에 기와집을 매입해 사용하다가, 영조 22년(1746)에 규모를 늘려 짓고, 영조 24년(1748)에 다시 고쳐 지으면서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건물은 몸채와 좌우 날개채, 대문채가 서로 연결되어 있는 ‘口’자형 구조로 되어 있으며, 대문채의 양 끝이 약간 돌출되어 있다.
몸채의 대청과 왼쪽 날개채에 있는 방에는 중앙에 기둥을 세운 형태의 창호가 설치되어 있는데, 건물이 지어진 연대를 가늠할 수 있게 하는 옛 방식이다.
비문은 권행의 후손인 권시(權諰, 1604~1672)가 지었고, 전서(篆書)는 조선시대의 학자로 예학(禮學)에 특히 밝았던 허목(許穆, 1595~1682)이, 글씨는 안동 권씨를 외가로 두었던 이경휘(李慶徽, 1617~1669)가 썼다. 비석을 보호하고 있는 비각은 1971년에 세운 것이다.
- 안동권씨는 시조 권행(權幸)이 성을 하사받은 후 10대에 이르어 15개의 파로 나뉘게 된다. 권수홍은 고려 때 상서좌복야 상장군(尙書左僕射 上將軍)이라는 벼슬을 역임해 그의 후손들은 ‘복야공파’가 되었다. 권인은 권수홍의 둘째 손자인 권윤평(權允平)의 증손자로, 예의판서(禮儀判書)를 지냈다. ‘판서공파’ 권인을 파조로 하는 그의 후손들은 풍산읍 노리에 세거하였다.
- 재사 오른편에 권인의 신도비와 비석을 보호하기 위한 신도비각이 있다. 신도비는 18대손인 권상규(權相圭, 1874~1961)가 세웠다고 한다. (다음 블로그 참조)
- 영쌍창(靈雙窓)은 창호 중간에 기둥[설주]을 두어 창문이 두 개처럼 보이게 하는 방식으로, 18세기 이전의 건축에서 보이는 고식(古式)이다.
- 송파재사의 동쪽 방향에 권수홍의 설단과 권인의 묘가 있다.
1차 수정
송파재사는 안동권씨 복야공파 파조인 권수홍(權守洪)의 묘단*과 판서공파 파조인 권인(權靷)의 묘소를 수호하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재사의 이름은 권인의 호에서 따왔으며, 재사 동쪽 언덕에 묘단과 묘소가 있다.
처음에는 권인의 묘제를 위해 조선 영조 19년(1743)에 기와집을 사서 재사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영조 22년(1746)에 규모를 늘리고 영조 24년(1748)에 다시 고쳐 지으면서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권수홍의 묘소는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어, 1994년 후손들이 권수홍의 5대손인 권인 묘소 근처에 묘단을 설치하였다.
이 재사는 몸채, 좌우 날개채, 대문채가 서로 연결되어 ‘口’자형 구조를 이루고 있다. 대문채의 양쪽 끝은 몸채보다 한 칸씩 튀어나온 형태이다. 전체적으로 1748년 중건 당시의 평면 구성과 형태에서 크게 바뀌지 않고 옛 양식을 잘 보전하고 있으며, 몸채의 대청과 왼쪽 날개채의 방에는 가운데에 기둥을 세운 형태의 창호가 설치되어 있다.
- 묘단(廟壇): 실제 묘를 대신하여 제사를 지내기 위해 설치한 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