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순평사 금동여래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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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국문
이 불상은 원래 전북 남원의 어떤 사찰에 있었다가 현재는 순평사의 본존불로 모시고 있다. 조각기법으로 보아 조선 초기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불상의 받침대나 부처의 광명을 상징하는 머리 뒤의 장식인 광배(光背)는 남아 있지 않다. 작고 꼭 다문 입에서 매우 근엄한 인상이 풍기는 불상으로, 전체적으로 자세가 안정되어 있고 단정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얼굴과 상체가 유난히 길게 표현된 점이 특징이다. 불상 아래 부분에서 발견된 함(函)에는, 불상을 조성할 때 넣은 유물들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지금은 1946년에 넣은 불경과 은제장신구 등이 들어 있다.
수정 국문
초고
이 불상은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본래는 남원의 한 사찰에 모셔져 있었다. 1945년 해방 이후에 담양군의 개인에게 옮겨 간 것을 장성군에 있는 백양사의 포교당에서 거의 완파 직전의 불상을 수습하였다. 이후 1973년에 중수하여 불상에 금칠을 다시 하였고, 1995년 순평사에 대웅전을 지으면서 옮겨오게 된 것이다.
불상의 받침대나 부처의 광명을 상징하는 머리 뒤의 장식인 광배(光背)는 남아 있지 않다. 전체적으로 자세가 안정되어 있고 단정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얼굴과 상체가 유난히 길게 표현된 점이 특징이다.
불상 아랫부분에서 유물을 넣어 두는 함이 발견되었는데, 불상을 처음 만들 때 넣은 유물은 모두 없어졌고, 지금은 1946년에 넣은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7권, 석고 불상 두 구, 은제 장신구, 발원문이 쓰인 깃발 모양의 번(幡), 1936년에 비단에 쓴 원문(願文) 및 보협 다라니, 복장 상자 등이 있다.
1차 수정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여래상이다. 여래는 ‘진리로부터 진리를 따라서 온 사람’이라는 뜻으로 부처의 덕성을 표현하는 열 가지 이름 중 하나이다.
원래 남원의 한 사찰에 모셔져 있었는데, 해방 이후 담양의 어느 개인이 소장하고 있다가, 이후 장성 백양사의 한 포교당에서 완파 직전의 상태로 발견되었다고 한다. 1973년에 불상을 보수하고 금칠을 다시 하였으며, 1995년 순평사에 대웅전을 지으면서 본존불로 모셨다.
불상은 전체적으로 자세가 안정되어 있고 단정한 모습이다. 얼굴과 상체가 유난히 길게 표현된 점이 특징이다. 불상 아랫부분에서 유물을 넣어 두는 함이 발견되었으며, 1946년에 넣은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7권, 석고 불상 2구, 은제 장신구, 발원문 등이 들어있었다.
자문의견
- 분야별 자문위원 1
-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여래상이다. -> 이 불상은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여래좌상이다.
- 분야별 자문위원 2
- 고려말~조선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되는 높이 104㎝의 금동불상이다. 불교를 억압했던 조선시대에는 값비싼 금동불상이 많이 만들어지지 않았으므로, 만약 조선초에 만들어졌다면 이 상은 매우 드문 예가 된다.
- 길게 강조된 상체, 배 부분의 리본 매듭이나 가부좌한 다리를 덮고 있는 옷주름의 정교한 표현은 고려 후기 금동불의 전통을 잇고 있으나 다소 경직된 느낌이 든다.
- 읽기쉬운문안 자문위원
- 문안의 내용은 통일할 수는 없지만 문안에 구성된 내용 순서는 통일될 필요가 있음. 처음에는 불상에 대한 형상설명, 크기, 소재지 등이 언급될 필요가 있고, 그 다음에 불상의 소유권에 대한 부연 자료가 상술되어야 함.
- 순평사 금동여래좌상은 전라북도 순창순 순창읍 순화리 순평사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다. 불상은 전체적으로 자세가 안정되어 있고 단정한 모습이며, 얼굴과 상체가 유난히 길게 표현된 점이 특징이다. 이 금동여래좌상은 가부좌를 틀고 있으며 오른손은 올리고 왼손은 무릎 위에 놓은 모습이다. 순평사 금동여래좌상의 조성시기는 조선 초기로 추정되며, 크기는 104cm이다. 이정도 크기의 금동여래좌상 조성사례는 조선시대 불교조각사에서 매우 드문 경우이다.
- 순평사 금동여래좌상 봉안처는 남원의 한 사찰이 있었는데, 해방 이후 담양 개인이 소장하고 있다가, 이후 장성 백양사의 한 포교당에서 완파 직전의 상태로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 뒤 1973년에 불상을 중수(重修)하였으며 1995년 순평사 대웅전을 지으면서 본존불로 모셨다. 불상 내부에서 발견된 복장물(腹藏物)로는 1946년에 납입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7권, 석고 불상 2구, 은제 장신구, 발원문 등이 있다
2차 수정
이 불상은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여래상이다. 여래는 ‘진리로부터 진리를 따라서 온 사람’이라는 뜻으로 부처의 덕성을 표현하는 열 가지 이름 중 하나이다.
원래 남원의 한 사찰에 모셔져 있었는데, 해방 이후 담양의 어느 개인이 소장하고 있다가, 이후 장성 백양사의 한 포교당에서 완파 직전의 상태로 발견되었다고 한다. 1973년에 불상을 보수하고 금칠을 다시 하였으며, 1995년 순평사에 대웅전을 지으면서 본존불로 모셨다. 현재의 손은 새로 만들어 붙인 것이다.
불상은 전체적으로 자세가 안정되어 있고 단정한 모습이며, 얼굴과 상체가 유난히 길게 표현된 점이 특징이다. 조선시대에는 값비싼 금동불상이 많이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높이가 1m 가량 되는 이러한 불상은 매우 드문 경우이다. 불상 내부에서 발견된 복장유물로는 1946년에 넣은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7권, 석고 불상 2구, 은제 장신구, 발원문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