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산청 인지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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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국문

인지재는 1816년(순조16)에 건립한 이후 1898년 (광무2)에 중건한 재실이다.

‘인지’는 논어에서 배우기 싫어하지 않음을 ‘지(智)’라 하고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음을 ‘인(仁)’이라 하는 데서 따온 말이다.

인지재라 편액한 강당은 정면5칸, 측면2칸의 규모이며 전면과 후면에 퇴칸을 둔 겹집형식으로서 방을 후퇴칸까지 연장하여 공간을 확장한 점이나 대칭의 배면에 반침을 둔 점 등은 조선후기의 평면구성이 확장 되는 예를 잘 보여주고 있다. 5량(樑)으로 가구 하였으며 서까래만 쓴 홑처마에 지붕은 합각지붕 형식이다. 대문채는 정면4칸, 측면 1칸의 규모이며, 홑처마, 맞배지붕으로 구성한 평대문 형식이다.

수정 국문

초고

이곳은 산청에서 세거(世居)하던 상산김씨(商山金氏)들이 지역사회를 대상으로 교육 활동을 하기 위해 사용하던 곳이다. 1816년(순조 16)에 건립한 이후 1898년(광무 2)에 중건하였다.

건물의 이름에 인(仁)과 지(智)를 쓴 이유는 곽종석의 인지재기(仁智齋記)에 자세히 나온다. 첫째, 사람의 성(性)은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의 5개이나 인과 지가 가장 귀하다. 둘째, 학문의 방법은 지(知)와 행(行)이 있는데 지(智)로써 알고 인(仁)으로써 행하는 것이다. 셋째, 유학의 공부법인 격물치지(格物窮理)는 지(智)에 이르는 방법이고 극기복례(克己復禮)는 인(仁)을 하는 방법이다. 넷째, 학문을 좋아하면 지(智)에 가까워지고 힘껏 행하면 인(仁)에 가까워진다.

건물의 이름을 인지재라 한 이유는 앞에서 설명한 인과 지를 합일하는데 있다. 당시는 1897년 10월 12일 대한제국(大韓帝國)이 선포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로 우리의 도가 천하에 밝혀지지도 않고 행해지지도 않고 있었다. 이때 상산김씨는 인과 지를 합일하여 나를 이루고 남을 이루는 뜻으로 학문을 가르쳤는데 이는 곧 세계에 우리 한국을 넓히고자 함이었다.

  • 人之性。仁智爲最貴。而學之道。知行而已。智以知之。仁以行之。是以聖門之學。必以知及仁守爲定本。推而至於成己成物樂山樂水。莫非是也。其用工節度。不過曰格物窮理以致知。克己復禮以爲仁爾。雖覺有蚤莫。得有淺深。而要之爲復聖之功而不畔於定本矣。其曰好學之近乎知。力行之近乎仁。盖所以勉人人之皆可與入德也。居是齋者。亦惟從事於克復之目。軆認於窮格之方。涵泳篤實。日新不已。以至私欲之凈而本心瑩然。則仁智合一。而存之爲成己。施之爲成物。皆將不外於性分之所固有者而足矣。若夫喣喣以爲仁。諓諓以爲智。汗漫流連於山水之樂。而竊仁智之跡以爲高而止焉。則非所以稱斯扁也。夫仁必本於孝悌。智莫急於當務。爲仁智者盍亦知所先焉。嗚呼道之不明不行於天下。而士無所於歸矣。余將見金氏之與有功於斯道。而是齋之日大以恢。能廣吾韓於天下也。謹書此以須之。

근처에는 물천서당(勿川書堂) 등 상산김씨 관련 유적이 함께하고 있다.

1차 수정

인지재는 산청에서 세거하던 상산김씨 문중에서 지역사회를 대상으로 교육 활동을 하던 곳이다. 순조 16년(1816)에 건립하고 1898년에 중건하였다.

1898년에는 조선 말의 학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면우 곽종석(俛宇 郭鍾錫, 1846~1919)이 인지재에서 강의를 열기도 하였다. 곽종석이 남긴 「인지재기(仁智齋記)」에 의하면, 건물 이름을 인지재라 한 것은 유교의 다섯 가지 기본 덕목 중 특히 귀한 인(仁)과 지(智)의 합일을 이루기 위해서라고 한다.

경내에는 대문채, 강당, 측간이 있는데, 측간은 후대에 지은 건물이다. 강당은 마루를 중심으로 양옆에 온돌방을 두었고, 앞쪽에는 툇마루를 두었다. 왼쪽에 있는 온돌방 뒷면에는 벽장이 설치되어 있고, 마루 뒷면에는 서적을 보관하기 위한 공간이 있다.

자문의견

  1. 분야별 자문위원 1
    • 인지재는 산청에서 세거하던 상산김씨 문중에서 지역사회를 대상으로 교육 활동을 하던 곳이다. 순조 16년(1816)에 건립하고 1898년에 중건하였다.
      1898년에는 조선 말의 학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면우 곽종석(俛宇 郭鍾錫, 1846~1919)이 인지재에서 강의를 열기도 하였다. 곽종석이 남긴 「인지재기(仁智齋記)」에 의하면, 건물 이름을 인지재라 한 것은 유교의 다섯 가지 기본 덕목 중 특히 귀한 인(仁)과 지(智)의 합일을 이루기 위해서라고 한다.
      경내에는 대문채, 강당, 측간이 있는데, 측간은 후대에 지은 건물이다. 강당은 마루를 중심으로 양옆에 온돌방을 두었고, 앞쪽에는 툇마루를 두었다. 왼쪽에 있는 온돌방 뒷면에는 벽장이 설치되어 있고, 마루 뒷면에는 서적을 보관하기 위한 공간이 있어서, 전후퇴가 발달한 겹집형태의 집이다.
  2. 분야별 자문위원 2
    • 인지재는 산청에서 활동하던 상산김씨 문중에서 지역사회를 대상으로 교육 활동을 하던 곳이다. 순조 16년(1816)에 건립하고 1898년에 중건하였다.
      1898년에는 조선 말의 학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면우 곽종석(俛宇 郭鍾錫, 1846~1919)이 인지재에서 강의를 열기도 하였다. 곽종석이 남긴 「인지재기(仁智齋記)」에 의하면, 건물 이름을 인지재라 한 것은 유교의 다섯 가지 기본 덕목 중 인(仁)과 지(智)의 합일을 이루기 위해서라고 한다.
      경내에는 대문채, 강당, 측간이 있는데, 측간은 후대에 지은 건물이다. 강당은 마루를 중심으로 양옆에 온돌방을 두었고, 앞쪽에는 툇마루를 두었다. 왼쪽에 있는 온돌방 뒷면에는 벽장이 설치되어 있고, 마루 뒷면에는 서적을 보관하기 위한 공간이 있다.
  3. 읽기 쉬운 문안 자문위원
    • 인지재는 산청에서 세거하던 상산 김씨 문중에서 지역사회를 대상으로 교육 활동을 하던 곳이다. 순조 16년(1816)에 건립하고, 1898년에 중건하였다.
      1898년에는 조선 말의 학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면우 곽종석(俛宇 郭鍾錫, 1846~1919)이 인지재에서 강의를 열기도 하였다. 곽종석이 남긴 「인지재기(仁智齋記)」에 의하면, 건물 이름을 인지재라 한 것은 유교의 다섯 가지 기본 덕목 중 특히 귀한 인(仁)과 지(智)의 합일을 이루기 위해서라고 한다.
      경내에는 대문채, 강당, 측간이 있는데, 측간은 후대에 지은 건물이다. 강당은 마루를 중심으로 양옆에 온돌방을 두었고, 앞쪽에는 툇마루를 두었다. 왼쪽에 있는 온돌방 뒷면에는 벽장이 설치되어 있고, 마루 뒷면에는 서적을 보관하기 위한 공간이 있다.

2차 수정

인지재는 산청에서 세거하던 상산김씨 문중에서 지역사회를 대상으로 교육 활동을 하던 곳이다. 순조 16년(1816)에 건립하고 1898년에 중건하였다.

1898년에는 조선 말의 학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면우 곽종석(俛宇 郭鍾錫, 1846~1919)이 인지재에서 강의를 열기도 하였다. 곽종석이 남긴 「인지재기(仁智齋記)」에 의하면, 건물 이름을 인지재라 한 것은 유교의 다섯 가지 기본 덕목 중 인(仁)과 지(智)의 합일을 이루기 위해서라고 한다.

경내에는 대문채, 강당, 측간이 있는데, 측간은 후대에 지은 건물이다. 강당은 마루를 중심으로 양옆에 온돌방을 두었고, 앞쪽에는 툇마루를 두었다. 왼쪽에 있는 온돌방 뒷면에는 벽장이 설치되어 있고, 마루 뒷면에는 서적을 보관하기 위한 공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