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부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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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국문

부석사는 신라의 대표적 고승 의상대사(서기 625~702)가 서기 677년 창건한 절로 알려져 있다. 2005년 부석사의 심검당 보수과정에서 나온 상량기에 의하면 ‘의상대사가 중국에 갔다 온 인연으로 부석사를 창건한 이래로’라는 내용으로 보아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설화는 오랫동안 전해져 온 사실을 알 수 있다. 의상대사는 신라시대 원효대사와 쌍벽을 이루던 고승으로 알려져 있다. 의상대사는 왕족출신으로 경주 황복사에서 20세에 스님이 되었다. 당시는 불교가 전래된지 얼마되지 않아 불교의 교학이 미천하여 불교학의 선진국인 당나라에 구법유학을 가서 공부를 하고 오는 것이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이에 의상과 원효가 함께 유학길에 올랐다. (신라 진덕여왕 4년 서기 650년) 처음에 시도한 여정은 고구려를 통해 요동반도로 들어가는 길이었으나 고구려 병사에게 잡혀 첩자로 오인을 받아 고초를 겪은 이후 경주로 다시 남하하게 된다. 이후 재차 당나라 구법유학의 길을 나서는데 이번에 선택한 길은 바닷길이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당항성(현 경기도 화성 해안)을 통해서 당나라에 가기 위해 배를 기다렸다고 한다. 원효는 해골물을 마시게 되는 인연으로 깨친 바 있어 되돌아오고 의상은 배를 타고 중국에 도착했다. 이 때는 의상의 나이 36세 되던 해(서기 660년)의 일이었다. 도착한 곳은 당나라 등주(登州)였는데 한 신도의 집에 잠시 머물렀다, 그 때 그 집의 선묘라는 딸이 의상에게 반하여 사모의 정을 마음에 품었으나 끝내 대사의 마음을 움직일 수는 없었다. 이에 선묘는 “세세생생 스님께 귀명하여 스님께 필요한 모든 것을 바치겠습니다”라며 소원을 말하고 마음을 미루어 두었다. 세월이 흘러 의상이 종남산의 지장사에서 지엄에게 화엄학을 배우고 돌아오는 길에 그 신도의 집에 들러 지난날 감사의 뜻을 전했다. 이때 선묘는 의상에게 청혼을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의상의 배는 이미 떠난 후 선묘는 바다에 몸을 던지며 이 내 몸이 용이 되어 저 배를 무사히 귀국하게 할 것이라는 발원을 하였다. 귀국후 의상은 선묘의 넋을 천도하기 위한 절을 지을 명당 자리를 찾아 나서는데 대사의 발길이 멈춘 곳은 당나라를 마주하고 있는 서해 바닷가 천하의 3대 명당자리 도비산이었다. 도비산이란 이름은 마치 섬이 날아가는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하여 불리는 이름으로 우리나라 3대 명당자리에 속하는 곳이다. 의상대사는 이곳이야말로 법륜을 새길만한 곳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곳은 백제의 멸망 후(서기 660년) 아직 백제의 유민들의 민심이 흉흉하던 지역이라 사람들의 반대가 많았다. 항상 의상을 따라다니던 선묘는 곧 의상의 뜻을 알아채고는 허공중에 커다란 바위들을 띄워 사람들을 물리친 뒤 바다에 그들을 띄워놓으니 감히 사람들이 범접하지 못하였다. 이래도 지역주민들은 바다에 떠 있던 돌을 부석 혹은 검은여라고 부르고 이곳에서 일년에 한번 재를 지내게 된다. 이후 부석사는 무학대사가 중창하고 근세에는 참선의 중흥조로 불리는 경허선사가 제자인 만공선사와 머물렀던 절로 호서지방의 명찰이라 할 수 있다.

수정 국문

초고

부석사(浮石寺)는 서산시 부석면 도비산(島飛山) 자락에 있는 사찰이다. 경상북도 영주에 있는 부석사와 마찬가지로 이곳의 부석사 또한 신라의 의상(義湘, 625~702)이 창건했다는 설화가 있다. 의상이 중국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부석사를 세웠다고 하는데, 아마도 이 지역이 서해를 건너 중국으로 드나드는 교통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의상과 관련된 전설이 생겨난 것으로 추정된다. 창건 이후 조선 초의 무학(無學, 1327~1405)이 다시 지었다고 전해진다. 근대에는 경허(1849~1912)와 만공(1871~1946) 스님이 머물면서 선종 불교를 크게 진작시켰다.부석사에는 현재 극락전, 안양루, 심검당, 산신각, 범종각 등의 건물이 있다. 그리고 ‘부석(浮石)’이란 글씨가 새겨진 부석바위가 극락전 옆에 있고, 절 경내 가까운 곳에 만공 스님이 수행하였다고 하는 만공토굴이 있다.

중심 건물인 극락전에는 조선후기에 만들어진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이 있었으나 1980년 도난당하여 현재는 1689년(숙종 15) 제작된 용봉사 아미타불좌상이 봉안되어있다. 이 불상은 용봉사가 파괴될 때 이곳으로 옮겨졌는데, 불상 안에서 나온 기록에 따르면 장희빈의 아들 왕자 균[경종]의 탄생을 기려 만들어졌다고 한다. 불상 뒤에는 1867년 공주 마곡사에서 만든 아미타후불탱이 있다. 한편 고려 충숙왕 17년(1330년)에 이곳 부석사에서 만든 금동관음보살상이 현재 일본 대마도 관음사에 봉안되어 있는데, 고려 후기 왜구에게 약탈된 것으로 추정된다.

문맥요소

요소 관계 설명
1 도비산(島飛山) 소재지 서산시 부석면에 있는 해발 352m의 산
2 조계종(曹溪宗) 소속 불교의 한 종파로 한국 불교 27개 종단 가운데 최대의 종단
3 선종(禪宗) 관련 종파 참선 수행으로 깨달음을 얻는 것을 중요시하는 불교의 한 종파
4 수덕사(修德寺) 본사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덕숭산에 있는 절
5 의상(義湘) 세운 사람 625~702년. 신라 시대의 스님
6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관련 기록물 조선 중기의 인문지리서.
7 무학(無學) 중창자 1327~1405. 고려 말 조선 초의 스님
8 호산록(湖山錄) 관련 기록물 1619년(광해군 11) 한여현(韓汝賢)이 편찬한 충청도 서산군(현재의 서산시)의 읍지
9 경허(鏡虛) 주요 인물 1849~1912. 속명은 송동욱(宋東旭). 법호는 경허(鏡虛), 법명은 성우(惺牛). 근대 선종(禪宗) 중흥에 힘쓴 스님.
10 만공(滿空) 주요 인물 1871~1946. 속명은 송도암(宋道巖). 법호는 만공(滿空), 법명은 월면(月面). 근대의 스님
11 금동관음보살상 유물 1330년 부석사에서 만들어진 유물. 현재 일본 대마도 관음사 소장

1차 수정

부석사는 신라의 고승인 의상(625~702)이 677년에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전설에 따르면, 의상이 당나라에서 유학하던 때 의상이 기거하던 집에는 선묘라는 낭자가 있었다. 선묘는 의상을 연모하게 되어 마음을 얻기 위해 애썼지만, 의상은 수행에만 전념하였고 이윽고 고국으로 돌아갔다. 이 소식에 슬퍼하던 선묘는 결국 바다에 몸을 던졌고, 죽어서 용이 된 뒤에는 귀국하는 의상의 바닷길을 수호하였다. 선묘의 도움으로 무사히 이곳 서해안에 도착한 의상은 가장 먼저 선묘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절을 지으려 하였다. 도적과 일부 백성들의 반대에 부딪혔으나 용이 된 선묘가 커다란 바위를 하늘에 띄워 반대하는 무리들을 물리쳤고, 이에 의상은 절을 지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후 절의 이름은 ‘떠 있는 바위’라는 뜻의 부석사가 되었다.

또 다른 이야기에 따르면 고려 말의 한 충신이 조선 개국 후 나라를 잃은 설움을 품고 이곳에 별당을 짓고 책을 읽으며 지냈다고 한다. 그가 죽은 뒤 별당은 사찰로 변했고, 도비산 자락 바위 절벽에 자리한 사찰이 마치 바다 가운데 바위섬이 떠 있는 것 같다 하여 ‘부석사’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창건 이후의 연혁은 자세히 전하지 않으며, 조선 초기에 무학대사(1327~1405)가 중건하였고 근대에 들어서는 고승 만공(1871~1946)이 주석하면서 선풍을 드날리기도 하였다.

경내에는 안양루, 극락전, 관음전, 산신각 등이 있다. 극락전에 모셔진 아미타여래좌상은 1689년 숙종의 왕자(후의 경종)가 탄생한 것을 기념하여 만든 것이다. 원래는 용봉사라는 절에 있었다가 1905년 이곳으로 옮겨왔다. 산신각에는 산신과 함께 선묘낭자와 용왕을 모셨으며, 산신각에서 산 위로 좀더 오르면 만공이 수행하던 토굴이 있다.

자문의견

  1. 불교문화재 위원1
    • 우리나라에서 ‘부석사’라는 대명사는 경북 영주에 위치한 부석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명칭에 ‘서산’이라는 단어를 추가하여 ‘서산 부석사’라 하는 것이 타당해보인다.
  2. 불교문화재 위원2
    • 현재 반환 소송으로 재판이 진행중인 전 일본 대마도 관음사 소장 금동관음보살좌상의 1330년 조성 복장기록을 바탕으로 사찰의 창건과 중창 연혁에 14세기 부석사 중창 가능성 언급 필요.

2차 수정

부석사는 신라의 고승인 의상(625~702)이 677년에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전설에 따르면, 의상이 당나라에서 유학하던 때 의상이 기거하던 집에는 선묘라는 낭자가 있었다. 선묘는 의상을 연모하게 되어 마음을 얻기 위해 애썼지만, 의상은 수행에만 전념하였고 이윽고 고국으로 돌아갔다. 이 소식에 슬퍼하던 선묘는 결국 바다에 몸을 던졌고, 죽어서 용이 된 뒤에는 귀국하는 의상의 바닷길을 수호하였다. 선묘의 도움으로 무사히 이곳 서해안에 도착한 의상은 가장 먼저 선묘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절을 지으려 하였다. 도적과 일부 백성들의 반대에 부딪혔으나 용이 된 선묘가 커다란 바위를 하늘에 띄워 반대하는 무리들을 물리쳤고, 이에 의상은 절을 지을 수 있었다고 한다. 선묘가 하늘로 들어 올렸던 부석은 현재 부석사 앞 10㎞ 지점의 바다에 있는 섬이 되었다고 하며, 이후 절의 이름은 ‘떠 있는 바위’라는 뜻의 부석사가 되었다. 영주 부석사에도 이와 유사한 창건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또 다른 이야기에 따르면 고려 말의 한 충신이 조선 개국 후 나라를 잃은 설움을 품고 이곳에 별당을 짓고 책을 읽으며 지냈다고 한다. 그가 죽은 뒤 별당은 사찰로 변했고, 도비산 자락 바위 절벽에 자리한 사찰이 마치 바다 가운데 바위섬이 떠 있는 것 같다 하여 ‘부석사’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창건 이후의 연혁은 자세히 전하지 않으며, 조선 초기에 무학대사(1327~1405)가 중건하였고 근대에 들어서는 고승 만공(1871~1946)이 주석하면서 선풍을 드날리기도 하였다.

경내에는 안양루, 극락전, 관음전, 산신각 등이 있다. 극락전에 모셔진 아미타여래좌상은 1689년 숙종의 왕자(후의 경종)가 탄생한 것을 기념하여 만든 것이다. 원래는 용봉사라는 절에 있었다가 1905년 이곳으로 옮겨왔다. 산신각에는 산신과 함께 선묘낭자와 용왕을 모셨으며, 산신각에서 산 위로 좀더 오르면 만공이 수행하던 토굴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