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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고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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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고 묘역
대표명칭 이고 묘역
한자 李皐 墓域
지정(등록) 종목 수원시 향토유산 제22호



해설문

국문

이고 묘역은 고려 말기의 인물인 이고(1341~1420)의 묘소이다.

이고는 본관이 여주(驪州), 호가 망천(忘川)으로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학사*에 올랐으나, 고려가 쇠망해 가자 수원으로 내려와 은거하였다.

이고는 ‘집 뒤에 있는 수원 탑산(塔山)의 정상에 오르면 사방이 통한다’ 라며 탑산을 ‘사통팔달(四通八達)’이라 하였다. 그가 사는 곳을 그린 그림을 본 조선 태조가 탑산을 팔달산(八達山)으로 바꿔 불렀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후에 조선 정조는 이고를 ‘팔달산 주인’으로 호칭하고 제문(祭文)을 지어 보내 묘소에서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또한 그는 백성들이 항상 선(善)을 행할 것을 권(勸)했는데 후대 사람들이 이고의 뜻을 기려 마을 이름을 ‘권선(勸善)’이라 하고, 그것이 이어져 오늘날의 권선동이 되었다고 한다.

묘역에는 후대에 마련한 것으로 추정되는 석물들과 영조 9년(1733)에 건립한 묘표(墓表)가 있다. 2007년 수원시 향토유산 제22호로 지정되었다.


  • 한림학사(翰林學士): 고려 시대 임금의 뜻을 글로 짓는 기관인 한림원(翰林院)에 소속된 정4품 관직으로, 정책 조언과 조서(詔書: 임금의 뜻을 일반인에게 알리는 글) 작성을 담당함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이곳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인 이고(1341-1420)의 묘이다. 묘역에는 1733년에 세운 묘표와 후대에 마련한 것으로 추정되는 석물들이 있다. 이 묘역은 2007년 수원시 향토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고는 고려시대인 1374년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지냈다. 그러나 고려가 쇠망해가자 수원에서 은거하였으며, 조선이 건국된 후 관직이 내려져도 끝내 고사하였다.

이고는 ‘집 뒤에 있는 수원 탑산의 정상에 오르면 사방이 통한다’ 라며 탑산을 ‘사통팔달(四通八達)’이라 하였다. 그가 사는 곳을 그린 그림을 본 조선 태조(재위 1392-1398)는 탑산을 팔달산으로 바꿔 불렀다고 한다. 후에 조선 정조(재위 1776-1800)는 이고를 ‘팔달산 주인’이라 부르고, 제문(祭文)을 지어 보내 묘소에서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또한 이고는 백성들이 항상 선(善)을 행할 것을 권(勸)했는데, 후대 사람들이 이고의 뜻을 기려 마을 이름을 ‘권선(勸善)’이라 하였고, 그것이 이어져 오늘날의 권선동이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