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청 척화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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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 척화비
Anti-appeasement Stele, Sancheong
산청 척화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산청 척화비
영문명칭 Anti-appeasement Stele, Sancheong
한자 山淸 斥和碑
주소 경상남도 산청군 산청읍 산청리 295-1번지
지정(등록) 종목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94호
지정(등록)일 1993년 12월 27일
분류 기록유산/서각류/금석각류/비
관리자 산청초등학교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1기
웹사이트 산청 척화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척화비는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이 1866년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를 치른 뒤, 서양세력의 침략을 경계하는 뜻을 담아 전국 각지에 세운 비석이다.

척화비에는 ‘서양의 오랑캐가 침입해 오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고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라는 내용의 열두 글자를 크게 새겼고, 그 옆에 ‘우리 만대 자손에게 경고한다(戒我萬年子孫)’는 내용이 작은 글자로 새겨져 있다. 1882년 흥선대원군이 실각한 후, 조선이 서양에 문호를 열게 되면서 척화비는 대부분 철거되었고 현재 전국에 남아 있는 20여 기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산청 척화비는 거북 모양의 받침돌 위에 비를 세운 형태이다. 고종 8년(1871)에 세웠으며, 원래는 관아 근처에 있던 환아정(換鵝亭)이라는 정자 앞에 있었다고 한다.

광복 이후 산청초등학교 교사 신축 과정에서 두 조각으로 갈라져 땅에 묻혀 있던 것을 발견하여 현재 위치에 복원하였다.

영문

Anti-appeasement Stele, Sancheong

This is one of the many anti-appeasement steles set up across the country in 1871.

Following devastating armed conflicts on Korean soil with France in 1866 and the United States in 1871, Heungseon Daewongun (1820-1898), the prince regent and de facto ruler during the early period of the King Gojong’s reign (r. 1863-1907), ordered these steles be erected to warn people against opening Korea to Western powers. Each stele bears twelve Chinese characters that read: “The Western barbarians have invaded. To not fight is to advocate peace. To advocate peace is to sell out the country.” Next to this admonition are small characters that read: “Let this be a warning to our offspring for the next ten-thousand years.” After King Gojong took control of state affairs, Korea opened itself to foreign exchange, and most such steles were taken down. Over 20 of them survived to this day and have been designated as cultural heritages.

The anti-appeasement stele in Sancheong consists of a body stone and tortoise-shaped pedestal. It is said that it was first erected in front of a pavilion named Hwanajeong near the local government office.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1910-1945), it was shattered vertically and buried underground. It was rediscovered during the reconstruction of Sancheong Elementary School and was repaired and erected at the current location.

영문 해설 내용

이 비석은 1871년 전국에 세워졌던 여러 척화비 중 하나이다.

조선 고종(재위 1863-1907)의 친부이자 당시 실권자였던 흥선대원군(1820-1898)은 1866년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 등을 치른 뒤, 서양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을 경계하고자 전국에 척화비를 세울 것을 명하였다. 척화비에는 ‘서양의 오랑캐가 침입해오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고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는 내용의 열두 글자를 크게 새겼고, 그 옆에 ‘우리들 만대 자손에게 경고한다’는 내용이 작은 글자로 새겨져 있다. 이러한 척화비는 고종이 친정을 하게 된 후, 조선이 문호를 열게 되면서 대부분 철거되었다. 현재 전국에 남아있는 20여 기의 척화비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산청 척화비는 거북 모양의 받침돌과 몸돌로 이루어져 있다. 원래는 관아 근처에 있던 환아정이라는 정자 앞에 있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세로로 쪼개져 땅에 묻혀 있던 것을 산청초등학교 교사 신축 과정에서 발견하여 현재 위치에 복원하였다.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