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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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강사
Bonggangsa Shrine
봉강사,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봉강사
영문명칭 Bonggangsa Shrine
한자 鳳岡祠
주소 전라남도나주시 문평면 오룡리 553-2번지
지정(등록) 종목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94호
지정(등록)일 1984년 2월 29일
분류 유적건조물/인물사건/인물기념/사우
수량/면적 1동
웹사이트 봉강사,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사우(祠宇)는 선조나 선현의 신주나 영정을 모셔 놓고 제사를 지내는 장소이다. 봉강사는 고려 때에 문신 송와 나문규와 죽헌 나계종을 기리기 위해 금성 나씨 문중에서 세운 사우이다. 1868년(고종 5) 서원 수를 줄이는 서원철폐령에 의해 철거하였다가 1924년에 다시 세웠다. 경내에는 제사를 지내는 사당과 공부하는 강당 영수재가 있다.

나문규(1312∼1355)는 고려 충혜왕 1년(1334) 문과에 급제하고 명경 박사를 거쳐 공민왕 1년(1352)에 서해안렴사를 지냈다. 나계종(1339∼1415)은 1362년(공민왕 11)에 문과에 급제한 후 춘추관검열, 사헌부시사, 예문관제학 등의 관직을 지냈다. 그러나 조선 건국 후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 하여 고향에 돌아와 초가집을 짓고, 주변에 소나무와 대나무를 심어 자신의 호를 죽헌(竹軒)이라 하고 여생을 보냈다.

이곳은 고목들로 둘러싸여 매우 평화롭고 고즈넉한 분위기를 풍기며, 마을 사람들의 휴식 공간으로 사랑받고 있다. 바로 위쪽에 나대용 생가가 있다.

영문

Bonggangsa Shrine

This shrine was founded by the Geumseong Na clan to honor two of their ancestors, namely Na Mun-gyu (1312-1379) and Na Gye-jong (1339-1415), both civil officials of the Goryeo period (918-1392).

Na Mun-gyu passed the state examination in 1340 and served various official posts. Na Gye-jong passed the state examination in 1362 and served an official post at the royal court. When Goryeo fell and the Joseon dynasty (1392-1910) was established, he resigned from his post refusing to serve the new king, and returned home to Naju. Here, he built a thatched-roof house and a grove of bamboo and pine trees, which both symbolize fidelity, and took on the pen name Jukheon, meaning “House of Bamboo.”

It is unknown when the shrine was first built, but in 1868, it was demolished when most shrines and Confucian academies were shut down by a nationwide decree. In 1924, the shrine was built anew. In 1951, it underwent an expansion, including the installation of an additional roof below the original one. The shrine serves as a meeting venue for the members of the clan and as a recreational space for the village community.

영문 해설 내용

고려시대의 문신인 나문규(1312-1379)와 나계종(1339-1415)을 기리기 위해 금성나씨 문중에서 세운 사당이다.

나문규는 1340년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지냈다. 나계종은 1362년 과거에 급제한 후 고려 조정에서 관직을 지냈다. 그러나 조선이 건국된 후에는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 하여 고향인 나주로 돌아왔다. 고향에서 초가집을 짓고 주변에 절개의 상징인 소나무와 대나무를 심어, 자신의 호를 죽헌이라 지었다고 한다.

봉강사를 처음 세운 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며, 1868년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가, 1924년에 다시 세웠다. 1951년 건물을 증축하면서 원래의 지붕 아래에 지붕을 하나 더 설치했다. 금성나씨 문중의 모임 장소로 쓰일 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들의 휴식 공간으로도 사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