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선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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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선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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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의선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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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毅禪閣 |
주소 | 충청남도 금산군 남이면 석동리 711 |
지정(등록) 종목 | 문화재자료 제29호 |
지정(등록)일 | 1984년 5월 17일 |
분류 | 유적건조물/종교신앙/불교/각루 |
수량/면적 | 1동 |
웹사이트 | 의선각,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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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국문
의선각은 승병장 영규(靈圭)대사가 갑사와 보석사를 오가며 수도할 때 머물던 건물이다. 영규대사는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승병 800여 명을 모아 의병장 조헌이 이끄는 700여 명의 의병과 함께 청주전투에 참전하여 청주성을 탈환하였고, 그 뒤를 이어 제2차 금산전투에 참전했으나 8월 18일 왜군과 격렬한 전투 끝에 순절하였다.
의선각은 익공식*의 맞배지붕 건물로 창녕위** 김병주가 ‘의선각(毅禪閣)’이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다.
본래 의선각은 영규대사의 위패 외에 선사(禪師) 아홉 분의 영정을 모시고 있었으나 영규대사의 위패를 칠백의총 종용사로 이전하면서 현재는 스님들이 생활하는 요사채로 사용하고 있다.
- 익공식: 기둥과 보 사이에 새 날개 모양의 장식을 배치한 건축양식
- 창녕위: 순조의 둘째 딸 복온공주와 결혼한 부마로서 김병주에게 주어진 관직의 이름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임진왜란 때 승병장으로 활약한 영규대사(?~1592)가 머물던 건물이다.
영규대사는 1592년에 일본군이 침략하자 승려로서는 처음으로 800여 명의 승병을 이끌고 참전하였다. 의병과 합세하여 청주성을 탈환하였으나 그해 8월 금산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순절하였다.
이후 의선각에는 영규대사의 위패와 선사 아홉 분의 영정을 모시고 있었다. 1647년 위패를 칠백의총으로 옮겼고, 현재 이 건물은 스님들이 생활하는 요사채로 사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