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평대군 치제문비
인평대군 치제문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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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인평대군 치제문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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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麟平大君 致祭文碑 |
주소 |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신평로222번길 12-48 |
지정(등록) 종목 | 시도유형문화재 제75호 |
지정(등록)일 | 1978년 10월 10일 |
분류 | 기록유산/서각류/금석각류/비 |
시대 | 조선시대 |
수량/면적 | 2기 |
웹사이트 | 인평대군 치제문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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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국문
인평대군(麟坪大君 1622~1658)은 인조의 셋째 아들이며 효종의 동생이다. 본관은 전주, 이름은 요(㴭), 자는 용함(用涵), 호는 송계(松溪), 시호는 충경(忠敬)이고, 1628년 7세 때 인평대군으로 봉해졌다. 1640년 볼모로 중국 심양에 다녀온 후 1650년부터 네 차례에 걸쳐 사은사(謝恩使-사신)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인평대군은 시, 서예, 그림을 잘하였을 뿐 아니라 학문에도 소양이 깊어 제자백가(諸子百家)에도 정통하였다. 인평대군의 묘는 포천시 신북면 신평리에 위치해 있다. 묘는 아내 오씨(吳氏)와 합장한 것으로 주변에 기와를 얹어 나지막한 담을 두르고, 무덤은 외부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8개의 긴 돌을 둘렀다. 봉분 앞에는 묘비, 향로석, 석등을 배치하고 좌우로는 동자와 군인 모양의 돌을 한쌍씩 놓았다.
치제문비는 인평대군 묘역의 왼쪽에 모셔져 있다. 글과 그림에 능하고 학문이 뛰어났던 인평대군이 36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자 형인 효종과 후대 왕들이 그의 인품과 업적을 치하하며 지은 비문으로 임금이 제문을 직접 짓고 쓴 어제어필(御製御筆) 비문이다.
치제문비에는 인평대군의 생애를 비롯해 병자호란 후 청나라에 볼모로 가 겪었던 고초와 그 후 사신으로 청나라에 가서 외교에 중요한 업무를 수행한 내용 등이 적혀있다. 치제문비는 모두 2기로 묘역 아래에 위치 한 비각 안에 동·서로 배치되어 있다. 서쪽 비의 앞면에는 1658년(효종)에 효종의 서간문에서 필요한 글자를 골라 뽑아서 만든 문장으로 새기고, 뒷면에는 1693년(숙종19) 포천으로 이장할 때 숙종이 쓴 어제어필, 동쪽의 비에는 1762년(영조28)과 1756년(영조41)의 영조의 글과 1792년(종조16)의 정조의 글을 새겼다. 인평대군의 치제문비는 인평대군에 대한 네 분의 임금이 치제한 내용과 글씨를 한 곳에서 볼 수 있는 소중한 금석문 유적이다.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인평대군(1622~1658)의 죽음을 애도하며 후대 왕들이 직접 지은 제문을 새긴 2기의 비석이다.
인평대군은 제16대 왕 인조(재위 1623~1649)의 셋째 아들이자 제17대 왕 효종(재위 1649~1659)의 동생이다. 시, 서예, 그림에 능하고 학문이 뛰어났다. 병자호란 이후인 1640년에는 청나라의 요청으로 인질이 되어 중국 심양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왔으며, 1650년부터 네 차례에 걸쳐 사신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36세의 젊은 나이에 병으로 요절했다.
2기의 치제문비는 비각 안에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왼쪽 비는 1693년에 만들어졌고 1724년에 세워졌다. 앞면과 뒷면에 각각 효종의 제문(1658년)과, 숙종이 쓴 제문(1693년)이 새겨져 있다. 오른쪽 비는 1792년에 세운 것으로, 당시에는 앞면에 영조(1762년, 1756년)와 정조의 제문(1792년)만 새겨져 있었다. 앞면 하단과 뒷면은 비어있었는데, 1825년 순조가 제문을 쓴 후 앞면 하단에 새기도록 했다.
한 인물을 기리는 비에서 조선시대 다섯 임금들의 글과 글씨를 볼 수 있는 귀중한 유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