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 고경명선생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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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명선생비
Stele of Go Gyeong-myeong
대표명칭 고경명선생비
영문명칭 Stele of Go Gyeong-myeong
한자 高敬命先生碑
주소 충청남도 금산군 금성면 양전리 522-15
지정(등록) 종목 충청남도 문화유산자료
지정(등록)일 1984년 5월 17일
분류 기록유산/서각류/금석각류/비
수량/면적 1기
웹사이트 고경명선생비, 국가유산포털, 국가유산청.



해설문

국문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 1533~1592)은 명종 13년(1558) 문과에 장원한 후 벼슬이 동래부사에 이르렀으나, 서인(西人)이 몰락하면서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그 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광주(光州)에서 모집한 의병 약 6천명을 이끌었고, 1592년 7월 10일 금산 눈벌에서 왜군과 격전 끝에 아들 인후(仁厚)와 함께 전사하였다. 효종 7년(1656) 금산군수 여필관(呂必寬)이 비문을 짓고, 선생이 전사한 건너편 산기슭에 비를 세웠는데, 1940년 일본 경찰의 만행으로 파괴되었다. 그 후 비석 파편을 와가(瓦家) 비각(碑閣) 안에 정리하여 두었다가, 1952년 후속들이 여필관의 비문을 다시 새겨 복원하였고, 1962년에는 석조비각(石造碑閣)을 건립하였다.

영문

Stele of Go Gyeong-myeong

This stele was erected to commemorate Go Gyeong-myeong (1533-1592), a civil official and civilian army leader during the Japanese invasions of 1592-1598.

Go Gyeong-myeong passed the state examination with the highest honors in 1558 and served in several official posts. While residing in his hometown of Gwangju after resigning from office due to political conflict, he raised a civilian army when the Japanese invasion broke out in 1592. Leading approximately 6,000 troops, Go Gyeong-myeong was killed in action together with his son Go In-hu during fierce fighting against the Japanese army in Geumsan.

In 1656, the local magistrate Yeo Pil-gwan composed an inscription and erected a stele in Go’s honor, but it was destroyed in 1940 by Japanese police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1910-1945). Fragments of the stele were later collected and kept in a pavilion. In 1952, Go Gyeong-myeong’s descendants restored the stele with a newly carved inscription, and the pavilion was rebuilt in 1962.

영문 해설 내용

이 비석은 임진왜란 때의 문신이자 의병장인 고경명(1533-1592)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고경명은 1558년 과거에 장원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지냈다. 정쟁으로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인 광주에서 지내고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켰다. 고경명은 약 6천 명의 의병을 이끌고 금산에서 왜군과 격전 끝에 아들 고인후와 함께 전사하였다.

1656년 금산군수 여필관이 비문을 지어 비석을 세웠는데, 일제강점기인 1940년 일본 경찰에 의해 파괴되었다. 그 후 비석 파편들을 비각 안에 정리하여 두었다가, 1952년 고경명의 후손들이 비문을 다시 새겨 복원하였고, 1962년에 비각을 다시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