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 해동청풍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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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청풍비
Stele of Jang Gi-seok
대표명칭 해동청풍비
영문명칭 Stele of Jang Gi-seok
한자 海東淸風碑
주소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봉계리 478-2
지정(등록) 종목 경상북도 기념물
지정(등록)일 1990년 8월 7일
분류 기록유산/서각류/금석각류/비
시대 일제강점기
수량/면적 397㎡
웹사이트 해동청풍비, 국가유산포털, 국가유산청.



해설문

국문

해동청풍비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인 자하 장기석(紫下 張基奭, 1860~1911) 의사를 기리기 위하여 1936년 지역의 유학자들이 세운 기념비로 앞면에 크게 “해동청풍(海東淸風)”이라고 큰 글자로 새겨져 있다.

장기석 의사는 1860년 지금의 성주 벽진면 봉계리인 집실마을에서 태어나 어려운 집안 탓에 39세의 늦은 나이에 부인의 권유로 공부를 시작하였으나 곧 학문에 통달하였다. 이후 민족정기와 독립 정신을 불어넣는 교육을 하였다.

1910년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하고 장기석 의사에게 일제에 순응하길 강요하자 이에 거부하여 일제 경찰에게 붙잡혀 위협과 회유에도 동요되지 않고 단식으로 맞서다 돌아가셨다.

이 때문에 1937년 일제가 파괴하여 버린 것을 1946년 그 파편을 찾아 다시 세우면서 뒷면에 비석의 건립 경위를 새겼는데 심산 김창숙(心山 金昌淑)이 글을 짓고 백범 김구(白凡 金九)가 비문을 썼다.

해동청풍비 옆에는 1937년 비석을 파괴하려는 일제에 자결로 항거한 장기석 의사의 부인인 함양 박씨를 기리는 기열비(紀㤠碑)가 함께 세워져 있다.

영문

Stele of Jang Gi-seok

This stele was erected in 1946 by local Confucian scholars to honor Jang Gi-seok (1860-1911), an independence activist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1910-1945).

Jang Gi-seok was born in Jipsil Village, now part of Bonggye-ri. Due to his family’s financial hardship, he began his studies relatively late at the age of 39 at the encouragement of his wife, Lady Bak, but he soon excelled and dedicated himself to teaching younger students. After Japan forcibly annexed Korea in 1910, he was pressured to attend a celebratory event organized by the colonial police. He refused and was imprisoned in Daegu Prison, where he died in custody after undertaking a hunger strike.

The original stele dedicated to him was erected in 1936 but was destroyed by the Japanese authorities the following year. After Korea’s liberation in 1945, fragments of the original were recovered and the present stele was reconstructed. An inscription on the back explains its construction, and it was composed and calligraphed by Kim Chang-suk (1879-1962) and Kim Gu (1876-1949), respectively, both of whom were independence activists and political leaders. The inscription on the front reads “Haedong Cheongpung,” meaning “the clear wind of Korea,” and it symbolizes unwavering moral integrity. This phrase derives from a Chinese tale about Boyi and Shuqi, who withdrew from public life after the Zhou conquest because they believed they could not serve two lords.

영문 해설 내용

이 비석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인 장기석(1860-1911)을 기리기 위해 1946년 지역의 유학자들이 세웠다.

장기석은 지금의 봉계리인 집실마을에서 태어났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39세가 되어서야 부인인 함양박씨의 권유로 늦은 공부를 시작하였으나, 곧 학문에 통달하여 후진양성에 힘썼다. 1910년 일제가 한국을 강제 병합한 뒤, 일제 경찰이 주최한 축하 행사 참석을 강요 받았으나 이를 거부했고, 이로 인해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는 옥중에서 단식으로 저항하다 끝내 순국하였다.

원래 1936년에 비석이 처음 세워졌으나, 이듬해 일제에 의해 파괴되었고, 1945년 광복 이후 비석의 파편을 수습하여 이 비석을 다시 세웠다. 비석 뒷면에는 건립 경위가 새겨져 있는데,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인 김창숙(1879-1962)과 김구(1876-1949)가 각각 비문을 짓고 글씨를 썼다. 비석 앞면의 “해동청풍”은 “한국의 맑은 바람”이라는 뜻으로, 고결하고 굳은 절개를 상징한다. 이 표현은 중국 상나라의 인물 백이와 숙제가 주나라의 정벌 이후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은거한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비석 옆에는 함양박씨를 기리는 비석이 함께 세워져 있다. 박씨는 1937년 비석을 파괴하려는 일제의 만행에 항거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