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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외금양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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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금양계비
대표명칭 외금양계비
한자 外禁養界碑



해설문

국문

외금양계비는 묘지 주변에 지정된 금양* 지역의 바깥 경계에 세운 비석으로, 그 안쪽의 토지가 보호구역임을 나타낸다. 이러한 경계표를 일반적으로 금표(禁標)라고 하는데 외금양계비도 일종의 금표라 할 수 있다.

조선 시대 법률책인 『경국대전』에는 벼슬의 품계에 따라 묘소의 면적과 경계를 정하고, 그 주변에서 경작과 목축을 금지하도록 규정하였다. 이에 묘지와 그 주변에 특별히 지정된 토지 외곽에는 금표를 세워 경계표로 삼았다.

정조 13년(1789)에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당시 수원 화산으로 옮기면서 묘의 이름을 현륭원(顯隆園)이라고 하였다. 외금양계비는 정조가 아버지 묘를 옮겨 현륭원을 조성한 후 이 구역을 보호하기 위해 정조 22년(1798)에 외금양계비를 세우도록 명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현륭원은 1897년 고종황제가 나라 이름을 대한제국으로 바꾼 후, 광무 3년(1899) 융릉(隆陵)으로 격상되었다.


  • 금양(禁養): 지정된 지역에서 나무를 베거나 묘지의 설치, 농지의 개간, 흙과 돌의 채취 등을 금지하고, 소나무를 비롯한 나무를 심고 키우는 것에 힘쓰는 것.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이 비석은 조선시대 왕실이나 고위 관료의 묘역 주변에 지정된 보호구역의 경계를 표시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조선시대 법률인 『경국대전』은 벼슬의 품계에 따라 묘소의 면적과 경계를 정하였고, 묘역 주변에서는 경작, 목축, 묘지 조성, 나무 베기, 흙과 돌 채취 등을 금지하였다. 대신 소나무를 비롯한 나무를 심고 가꾸는 일에 힘쓸 것이 권장되었다.

조선 제22대 왕 정조(재위 1776-1800)는 1789년 아버지 사도세자(1735-1762)의 묘를 양주에서 수원으로 이장하고 현륭원이라 하였다. 그리고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역을 보호하기 위해 1798년 이 비석을 세우도록 명하였다. 현륭원은 1899년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되면서 왕릉의 위상을 갖게 되었고, 이름도 융릉으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