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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 쌍충사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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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원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4년 12월 6일 (금) 16:11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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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충사적비
대표명칭 쌍충사적비
한자 雙忠事蹟碑
주소 경상북도 성주군 심산로 91-1
지정(등록) 종목 경상북도 유형문화유산
지정(등록)일 1974년 12월 10일
분류 기록유산/서각류/금석각류/비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1기
웹사이트 쌍충사적비, 국가유산포털, 국가유산청.



해설문

국문

쌍충사적비는 임진왜란 때 앞장서서 의병을 일으켜 적과 싸우다 전사한 제말(諸沫)과 조카인 제홍록(諸弘祿)의 공적을 기려 1792년(정조 16) 왕의 명령으로 세운 충신 사적비*이다. 제말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웅천(진해 지역), 김해, 의령 등지에서 왜적과 싸워 공을 세웠으며, 그 공이 조정에 알려져 성주목사에 임명되었으나 이후 왜적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나중에 병조 판서에 추증**되고 충의(忠毅)라는 시호***를 받았다. 제홍록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숙부인 제말을 따라 의병을 일으켜 웅천, 김해, 의령 등지의 싸움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왜군에게 포위된 진주를 지원하기 위하여 출전 중 갑작스럽게 적을 만나 적장을 죽이고 전사하였다. 이후 병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비석의 형태는 네모난 바닥 돌 위에 비석의 몸체를 세우고 용을 조각한 머릿돌을 얹은 모습이다. 전체 높이 329㎝의 대형 비석으로, 비석의 몸체는 높이 223㎝, 폭 79㎝, 두께 37㎝이며, 새긴 글에 붉은색을 넣었다. 비석에 새긴 글은 한성부 판윤을 지낸 서유린(徐有隣)이 짓고, 글씨는 영의정을 지낸 이병모李秉模가 썼다.

비석은 지금의 성주초등학교 앞에 세워져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에 일본에 의해 훼손되어 비각이 헐리고 방치되었다. 그러다가 1940년경에 도로 확장 공사를 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워졌다.


  • 사적비(事蹟碑): 어떤 사건이나 사업에 관련된 사실 또는 자취를 기록한 비석
  • 추증(追贈): 나라에 공로가 있는 벼슬아치가 죽은 뒤에 그의 관직을 높여 주던 일
  • 시호(諡號): 왕, 왕비를 비롯해 벼슬한 사람이나 학덕이 높은 선비들이 죽은 뒤에 받은 특별한 이름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쌍충사적비는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인 제말(1552-1593)과 조카 제홍록(1558-1597)을 기리기 위해 1792년에 세워졌다. 비석의 이름은 “두 충신의 사적을 기리는 비석”이라는 뜻이다.

제말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웅천(지금의 진해 지역), 김해, 의령 등지에서 왜적과 싸워 공을 세웠다. 그 공이 조정에 알려져 성주목사에 임명되었고, 성주성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이후 병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제홍록은 숙부인 제말을 따라 의병을 일으켜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1597년 왜군에게 포위된 진주를 지원하기 위하여 출전하던 중 갑작스럽게 적을 만나 적장을 죽이고 전사하였다. 이후 병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비석은 지금의 성주초등학교 앞에 세워져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일본에 의해 훼손되어 비각이 헐리고 방치되었다. 그러다가 1940년 무렵에 도로 확장 공사를 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워졌다. 비석은 네모난 받침돌, 비문이 새겨진 몸돌, 머릿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전체 높이가 329cm에 이른다. 머릿돌에는 두 마리의 용이 머리를 맞대고 여의주를 물고 있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비문은 한성부 판윤을 지낸 서유린(1738-1802)이 짓고, 글씨는 영의정을 지낸 이병모(1742-1806)가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