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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룡 사계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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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yndsey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9년 8월 20일 (화) 19:36 판 (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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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룡 사계고택
Sagye House, Gyeryong
"계룡 사계고택",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계룡 사계고택
영문명칭 Sagye House, Gyeryong
한자 鷄龍 沙溪古宅
주소 충청남도 계룡시 사계로 122-4
지정(등록) 종목 시도기념물 제190호
지정(등록)일 2013년 11월 11일
분류 유적건조물/인물사건/인물기념/생활유적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1곽
웹사이트 "계룡 사계고택",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사계고택은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1548-1631)선생이 말년에 벼슬을 버리고 내려와 살았던 집이다. 이곳은 선생이 향리인 연산(連山)을 세거지로 하여 구봉(龜峰) 송익필(宋翼弼)과 율곡(栗谷) 이이(李珥)에게 학문을 배우면서 성장했던 곳이며, 낙향해서도 후학양성과 학문에만 전념했던 곳이다. 사후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고 문묘(文廟)에 배향되었으며, 그의 학문은 아들인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을 비롯하여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초려(草廬) 이유태(李惟泰) 등의 제자들에게 계승되었다.

크기는 2,850㎡의 대지에 안채와 사랑채, 안사랑채, 곳간채, 광채, 문간채, 행랑채 등이 있으며, 원래의 모습을 비교적 잘 유지하고 있다. 이 중에 사랑채인 은농재(隱農齋)는 처음에는 초가지붕의 형태를 띠고 있었으나, 지금은 기와로 지붕을 올린 형태이다. 정면 4칸‧측면 2칸의 평면으로 구성하였고, 배치도 당대 양반가의 일반적인 방법을 잘 따르고 있다. 대문에는 현대 서예가 여초 김응현이 쓴 ‘사계고택(沙溪古宅)’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영문

This house was the residence of Kim Jang-saeng (1548-1631, pen-name: Sagye), an eminent philosopher and politician of the mid-Joseon period.

Kim Jang-saeng did not take the state examination but served various official posts through a recommendation system due to his academic excellence. After retirement, he returned to his hometown and stayed in this house to dedicate himself to studying. He was a great authority in ritual studies, and his disciples, including Song Jun-gil, Song Si-yeol, Yi Yu-tae, and his son Kim Jip, were distinguished scholars of the late Joseon period.

Built in 1603, this house consists of a gate quarters, women’s quarters, men’s quarters, storehouse, and servants’ quarters. The men’s quarters, where Kim Jang-saeng stayed, was originally a thatched-roof building but was renovated with a tiled roof.

영문 해설 내용

조선 중기의 사상가이자 정치가인 김장생(1548-1631, 호: 사계)이 살던 집이다.

김장생은 과거시험을 보지 않았지만, 학문에 뛰어난 사람을 추천하는 제도를 통해 여러 관직을 지냈다. 벼슬에서 물러난 후에는 이곳에 머물면서 학문에 전념하였다. 그는 예학의 대가였으며, 송준길, 송시열, 이유태, 아들 김집을 비롯한 그의 제자들은 조선 후기 저명한 성리학자로 이름을 떨쳤다.

1603년에 건립된 이 집은 대문채, 안채, 사랑채, 곳간채, 문간채, 행랑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랑채가 김장생이 주로 사용하던 공간인데, 원래는 초가였으나 이후 보수 과정에서 기와지붕으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