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문성

HeritageWiki
강혜원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4년 11월 6일 (수) 10:26 판

이동: 둘러보기, 검색
관문성
Gwanmunseong Fortress
"관문성",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관문성
영문명칭 Gwanmunseong Fortress
한자 關門城
주소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산업로 1739-6, 울산 북구 달천동, 중산동, 천곡동 및 범서면
지정(등록) 종목 사적
지정(등록)일 1963년 1월 21일
분류 유적건조물/정치국방/성/성곽
시대 통일신라
수량/면적 991,774㎡
웹사이트 "관문성",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2019

관문성은 울산광역시와 경상북도 경주시의 경계를 따라 돌로 쌓은 산성이다. 왜구의 침입으로부터 경주를 보호하기 위해 신라 성덕왕 21년(722)에 만들었다고 한다. 『삼국유사』에는 당시 최고위 벼슬의 하나였던 각간(角干)을 지낸 원진(元眞)이 39,262명의 인원을 동원하여 이 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관문성이라는 이름은 경주로 들어가는 관문 역할을 한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원래는 모벌군성(毛伐郡城), 모벌관문(毛伐關門)이라 불렀는데 조선 시대에 관문성으로 부르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약 12km에 이르는 긴 길이 때문에 만리성(萬里城)으로도 불렀다.

성벽은 길이 40~50cm, 두께 20~30cm의 다듬은 돌을 쌓아 만들었는데, 돌을 쌓는 방식은 위쪽으로 갈수록 층지게 들여쌓는 물림쌓기 방식이다.

2024

관문성은 울산광역시와 경상북도 경주시의 경계를 따라 돌로 쌓은 산성이다. 신라 성덕왕 21년(722)에 왜구의 침입으로부터 경주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삼국유사』에는 당시 최고위 벼슬이었던 각간(角干)을 지낸 원진(元眞)이 39,262명을 동원하여 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관문성은 경주로 들어가는 관문의 역할을 한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원래는 모벌군성(毛伐郡城), 모벌관문(毛伐關門)이라 불렀는데 조선 시대에 관문성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서쪽의 치술령부터 동쪽의 기박산성에 이르는 약 12km의 긴 길이 때문에 만리성(萬里城)이라고도 불렀다.

2019년과 2024년 발굴 조사로 성의 체성부*, 기저부**, 채움석을 확인하고 성벽 축조방식을 파악하였다.

  • 체성부 : 성벽의 몸체 부분
  • 기저부 : 성벽의 몸체 부분 아래 기초시설

영문

  • Gwanmunseong Fortress

2019

This stone fortress was built in 722 to protect the area to the east of Gyeongju, the royal capital of the Silla kingdom (57 BCE – 935 CE). It played a pivotal role in guarding the strategic path from Ulsanman Bay to the Gyeongju area.

According to the Memorabilia of the Three Kingdoms (Samguk yusa), a minister named Won Jin mobilized 39,262 workers for the construction of this fortress. The fortress walls stretched from mountain to mountain, and their total length was about 12 km. The walls were built by stacking stone bricks cut in dimensions of 40-50 cm in length and 20-30 cm in thickness, attesting to the advanced construction techniques of the time. Most of the walls collapsed over time and the remains can be found near the border between modern-day Ulsan and Gyeongju.

2024

영문 해설 내용

2019

관문성은 722년 신라의 왕경이었던 경주의 동쪽 지역을 보호하기 위해 돌로 쌓은 산성이다. 울산만에서 경주 쪽으로 진입하는 중요한 길목을 방어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당시 대신인 원진이 39,262명을 동원해서 성을 쌓았다고 한다. 산과 산을 연결하며 길게 성벽을 쌓았으며 총 길이가 12km에 달했다고 한다. 길이 40~50cm, 두께 20~30cm 크기로 잘 다듬은 돌을 쌓아 만든 성벽을 통해 당시의 발달된 축성 기술을 확인할 수 있다. 현재 성벽은 대부분 허물어졌고, 지금의 울산과 경주의 경계를 따라 일부가 남아있다.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