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 팔마비
순천 팔마비 Palmabi Monument, Sunche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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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순천 팔마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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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Palmabi Monument, Suncheon |
한자 | 順天 八馬碑 |
주소 | 전라남도 순천시 중앙로95 (영동, 순천문화재단) |
지정(등록) 종목 | 보물 |
분류 | 기록유산/서각류/금석각류/비 |
시대 | 조선시대 |
수량/면적 | 1기 |
웹사이트 | 순천 팔마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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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해설문
국문
2019
현재의 팔마비는 1616년 순천부사로 부임한 이수광이 지역의 옛 자취를 찾다가 고려시대 최석 부사의 선정에 관한 내용을 알고 지역의 유림들과 함께 1617년에 세운 비석이다.
최석 부사는 고려시대 사람으로 1278년(충렬왕 4) 승평부사로 부임하여, 1281년 12월(충렬왕 7)에 비서랑의 직을 받아 승평부를 떠나게 되었다.
당시 승평부에서는 관례상 태수가 교체되어 돌아갈 때면 반드시 말 8필을 주는 것이 관례였다. 최석이 돌아가 “내가 너의 고을에 수령으로 있을 때 내 말이 새끼를 낳았길래 데려왔는데 이는 나의 탐욕이다. 너희들이 그러한 나의 탐욕을 알고서 겉으로 사양하는 것인가?”하면서 그 망아지까지 주었다. 이로부터 말을 바치는 폐단이 끊어졌으므로 고을 사람들이 송덕비를 세워 ‘팔마비(八馬碑)’라 이름 하였다고 한다.
최석의 팔마비는 최석 부사가 비서랑의 관직을 받아 떠난 이후, 즉 1281년 12월 이후로 추정되며,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훼손된 것을 1617년(광해군 9)에 순천부사 이수광(李晬光)이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비는 원래 연자교(현 남문교) 남쪽 길가에 있었음을 조선 후기 옛 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1930년 도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1977년 8월에 비의 보호를 위해 비각을 세웠다.
2024
팔마비는 고려 시대 승평부사(昇平府使) 최석(崔碩)의 청렴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고려사』 「최석열전」에 의하면, 승평부(지금의 순천)는 수령이 교체되면 말 8필을 바치는 관례가 있었다. 최석 부사는 임기를 마치고 비서랑에 임명되어 개경에 도착한 뒤, 받은 말 8필과 자기 말이 승평부에서 낳은 망아지까지 모두 9필의 말을 되돌려 보냈다. 이후 승평부에는 임기를 마친 수령에게 말을 바치는 폐습이 사라졌고, 승평의 백성들은 최석 부사의 청렴한 공덕을 기리기 위해 ‘팔마비’를 세웠다.
팔마비는 고려 충렬왕 7년(1281) 이후에 처음 세워진 뒤 쓰러진 것을 공민왕14년(1365) 부임한 승평부사 최원우(崔元祐)가 고쳐 세웠다. 이후 정유재란 때 훼손된 것을 광해군 9년(1617)에 순천부사 이수광(李睟光)이 다시 세웠다.
앞면 ‘팔마비’ 세 글자는 진사 원진해(元振海)가 쓴 글씨이다. 뒷면 음기*는 이수광이 지었고, 김현성(金玄成)이 글씨를 썼다. 연자루(燕子樓) 앞 옥천 가에 있다가 1930년 현 위치로 옮겨졌고, 1977년에 비각이 건립되었다.
팔마비는 고려 시대인 13세기 말에 처음 건립되었다. 그 후 조선 후기에 이수광이 다시 세워 현재까지 4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순천을 대표하는 중요 유물이다. 우리나라 지방관의 선정(善政)과 청덕(淸德)을 기리는 송덕비**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점에서 그 역사적 가치가 크다.
- 음기(陰記) : 비석의 뒷면에 어떤 사실을 기록한 비문
- 송덕비(頌德碑) : 공덕을 칭송하는 문자를 새긴 비
영문
Palmabi Monument, Suncheon
2019
This monument was erected to honor the benevolent governance of Choe Seok, a civil official of the late period of the Goryeo dynasty (918-1392).
In 1278, Choe Seok was appointed Local Magistrate of Seungpyeong (today’s Suncheon area) and served his post until 1281. At that time, there was a strictly observed custom in Seungpyeong, in which at the end of the magistrate's service, the local people presented him with eight horses. When the locals presented eight horses to Choe Seok, not only did he return the horses, but also sent a colt that his own horse had foaled while he was serving as magistrate. After this, the custom was abandoned and residents erected a monument named Palmabi, meaning "Eight Horse Monument," to honor the meritorious deeds of Choe Seok.
The monument was presumed to originally have been erected after Choe Seok left his post in 1281, but it was destroyed during the Japanese invasion of 1597. In 1617, it was erected again by Local Magistrate Yi Su-gwang.
According to the old map of the Suncheon area drawn in the late period of the Joseon dynasty (1392-1910), the original location of the monument was to the south of Nammungyo Bridge, but it was moved to its current location in 1930 due to road construction. In 1977, a protective pavilion for the monument was built.
2024
영문 해설 내용
2019
이 비석은 고려 후기의 문신인 최석의 선정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최석은 1278년 승평(오늘날의 순천 지역) 부사로 부임하였고, 1281년까지 재임하였다. 당시 승평에서는 부사가 임기를 마치고 떠날 때 반드시 말 8마리를 주는 것이 관례였고, 이에 따라 마을 주민들이 최석에게 말 8마리를 보냈다. 그러나 최석은 선물로 받은 말과 승평에 있을 때 자신의 말이 낳은 망아지까지 총 9마리의 말을 돌려보냈다. 이때부터 말을 바치는 폐단이 없어졌고, 주민들은 그의 공덕을 기려 비를 세우고 ‘팔마비’라고 이름하였다.
이 비석은 최석이 승평을 떠난 1281년 이후에 처음 세워졌던 것으로 추정되며, 1597년 정유재란 때 훼손되었다. 1617년 부사 이수광이 최석의 선정을 기리며 다시 세웠다.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순천 지역 옛 지도에 따르면, 이 비석은 원래 남문교 남쪽에 있었으나, 1930년 도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비각은 1977년에 세웠다.
2024
팔마비는 고려시대의 문신인 최석의 선정과 청렴을 기리기 위해 13세기 말에 세운 비석이다. 4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순천을 대표하는 유물이다.
『고려사』에 의하면 승평(지금의 순천 지역)에는 부사가 임기를 마치고 떠날 때 주민들이 부사에게 말 8필을 바치는 관례가 있었다. 당시 승평 부사였던 최석은 1281년 임기를 마치고 개경으로 돌아갔는데, 선물로 받은 말 8필과 임기 중에 자신의 말이 낳은 망아지까지 모두 9필의 말을 되돌려 보냈다. 이후 승평에서는 임기를 마친 부사에게 말을 바치는 폐습이 사라졌고, 승평의 백성들은 최석의 청렴한 공덕을 기리기 위해 비석을 세우고 “말 여덟마리”라는 뜻의 ‘팔마비’라고 이름하였다. 처음 세워진 비석이 쓰러져 1365년에 고쳐 세웠고, 정유재란 때 훼손된 것을 1617년에 부사 이수광(1563-1628)이 다시 세웠다. 원래 지금 위치에서 동쪽으로 약 1km 떨어진 연자루(순천읍성 남문) 인근에 있다가, 1930년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고, 1977년에 비각이 건립되었다.
비석 앞면에는 비석의 이름이 돋을새김으로 크게 새겨져 있는데, 명필 원진해(1594-1651)가 쓴 글씨이다. 뒷면의 비문은 이수광이 지었고 문신이자 서화가인 김현성(1542-1621)이 글씨를 썼다. 비문에는 최석의 덕이 구전되어 기려지고 있다는 내용과 팔마비를 통해 관리들에게 본보기게 되게 한다는 뜻이 있음이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