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천 한산읍성
한산읍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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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한산읍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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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韓山邑城 |
주소 |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지현리 152-3 외 |
지정(등록) 종목 | 충청남도 문화유산자료 |
지정(등록)일 | 1984년 5월 17일 |
분류 | 유적건조물/정치국방/성/성곽 |
시대 | 조선시대 |
수량/면적 | 지정구역 6,534.9㎡ / 보호구역 94,942.7㎡ |
웹사이트 | 한산읍성, 국가유산포털, 국가유산청. |
해설문
국문
한산읍성은 조선시대에 한산군에 쌓은 읍성으로, 다른 지역의 읍성과 마찬가지로 왜구의 침입으로부터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행정적인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축성하였다.
한산읍성이 언제 축성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동국여지지(東國輿地誌-1656년)』에 ‘조선 공희왕(중종)대에 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실제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년)』에 ‘석성으로 둘레가 4,070척이며, 높이가 11척이고, 그 안에 도랑 하나와 우물 넷이 있다’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중종대(재위1506~1544년)인 1506~1529년 사이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산읍성의 평면형태는 사다리꼴에 가깝다. 전체 둘레는 약 1,919m이고, 동벽과 서벽의 일부 구간을 제외하면 1,245m 정도가 남아있다. 성벽은 바깥쪽을 돌로 쌓아 올리고, 안쪽은 흙으로 다짐하여 축조하였다. 성돌(面石)은 성벽의 하부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작은 석재를 사용하였으며, 성돌과 성돌 사이의 틈새는 작은 돌로 메웠다. 성벽의 안쪽은 계단상의 내벽을 만든 후 그 위로 흙을 경사지게 덮어 성내에서 성벽 위로 이동하기 쉽게 하였다.
성문은 4개의 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일제강점기 이래로 도로가 개설되면서 모두 유실되어 정확한 형태와 위치를 알 수 없다. 현재는 4개의 성문 중 남문만을 재현해 놓았다. 적의 공격을 막기 위해 성벽 일부를 밖으로 돌출시켜 쌓은 치성(雉城)*은 현재 남벽과 북벽에 각각 1개소씩 남아있다. 남벽과 북벽의 성 밖으로는 해자(垓字)** 흔적도 남아있다.
『여지도서(輿地圖書-1757~1765년)』에 의하면 성내에는 객사(客舍)·동헌(東軒), 대청(大廳), 서헌(西軒), 내아(內衙), 도제헌(道齊軒), 매화당(梅花堂) 등의 건물이 있었다고 하지만,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 치성(雉城): 전투 시 적을 조기에 발견하고,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을 양 측면에서 공격하는 시설
- 해자(垓字): 성곽을 방어하기 위해 그 바깥으로 둘러 판 도랑시설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읍성이란 지방 주요 지역에 쌓은 성으로, 지방 주민들을 보호하고 군사, 행정 기능을 담당하던 곳이다.
한산읍성은 특히 왜구의 침입으로부터 주민을 보호하기 위한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조선시대인 1506~1529년 사이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전국의 읍지를 모아 간행한 『여지도서』(1757~1765년)에 의하면, 한산읍성 안에는 객사, 동헌, 대청, 서헌, 내아, 도제헌, 매화당 등의 건물이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한산읍성의 평면 형태는 사다리꼴에 가깝다. 전체 둘레는 원래 약 1,919m인데, 동벽과 서벽의 일부 구간을 제외하고 1,245m 정도가 남아 있다. 성벽은 바깥쪽을 돌로 쌓아 올리고, 안쪽은 흙으로 다져서 축조하였다. 성벽의 아래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작은 석재를 사용하였으며, 돌 사이의 틈새는 작은 돌로 메웠다. 성벽의 안쪽은 계단상의 내벽을 만든 후 그 위로 흙을 경사지게 덮어 성내에서 성벽 위로 이동하기 쉽게 하였다.
이 읍성에는 4개의 성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일제강점기 이래로 도로가 개설되면서 모두 유실되어 정확한 형태와 위치를 알 수 없다. 남문은 2022년에 복원되었다. 남벽과 북벽에는 적의 공격을 막기 위해 성벽 일부를 밖으로 돌출시켜 쌓은 치성이 1개소씩 남아 있다. 남벽과 북벽의 성 밖으로는 해자의 흔적도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