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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곡 매원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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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원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3년 9월 23일 (토) 15:36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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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곡 매원마을
칠곡 매원마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칠곡 매원마을
한자 漆谷 梅院마을
주소 경상북도 칠곡군 매원3길 104-5 (매원리)
지정(등록) 종목 국가등록문화재
지정(등록)일 2023년 6월 15일
분류 등록문화재 / 기타 / 주거숙박시설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47,213㎡
웹사이트 칠곡 매원마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칠곡 매원마을은 400여 년을 이어 온 광주 이씨(廣州李氏) 집성촌이다. 안동 하회마을, 경주 양동마을과 함께 영남 3대 반촌(班村) 중 하나이다. 풍수지리상 주산에 해당하는 북쪽의 용두산과, 용두산의 왼쪽으로는 죽곡산이, 오른쪽에는 산두산이 마을을 감싸고 마을 앞으로는 동정천이 흐르는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 지형에 넓은 문전옥답을 안은 명당이다. 마을 이름은 ‘매화낙지형(梅花落地形)’*의 길지에 마을이 있다는 점에서 또는 매화와 매실이 많았던 이 마을에 여행객의 숙식 편의를 제공하던 ‘원(院)’이 있었다는 점에서 유래되었다고도 한다.

1623년 석담 이윤우*가 이곳에 감호당(鑑湖堂)을 지은 뒤 인근의 지천면 신리 웃갓마을에 있는 종가에 장남 이도창을 남겨 두고, 차남 낙촌 이도장(李道長), 삼남 감호당 이도장(李道章)과 함께 정착하였다. 이후 이 마을에는 낙촌 이도장의 차남인 박곡 이원록*의 후손과 감호당 이도장의 후손이 대대로 거주하고 있다. 특히 이원록의 장남이 마을의 중앙인 중매에 자리를 잡고, 차남은 동쪽의 상매, 감호당 이도장의 후손들은 서쪽의 서매로 각각 동촌(同村) 분파하면서 마을의 영역이 좌우로 확장된 점은 다른 전통 마을의 확장 양상과 구별되는 이 마을만의 특색이다.

마을 내 가옥들은 튼 ‘ㅁ’ 자형, 튼 ‘ㄷ’ 자형, ‘二’ 자형 등의 형태를 띤다. 19세기 이후에 건립한 가옥은 튼 ‘ㅁ’ 자형 위주에 사랑채는 안채 앞이나 안마당 옆에 배치하고, 사랑채 옆으로 곳간채, 아래채 등을 나란히 배치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안마당 좌우로 별도의 곳간채, 광 등 저장 공간이 배치된 점은 19세기 이후 농업을 기반으로 한 부농층의 주거 배치 형태와 비슷하다. 이것은 신분보다는 경제력에 따라 건축 형태가 달라지는 당시 사회상을 입증하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기록에 따르면 마을 남쪽에 사창(社倉)이 있었으며, 1900년대 초 마을이 가장 번성하였을 때에는 420여 호 이상의 기와집과 180여 호의 초가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6·25전쟁 당시 매원마을에 주둔한 북한군을 공격하려고 유엔군이 대규모 폭격을 가해 가옥 대부분이 불에 타 없어졌다. 현재 남아 있는 전통 가옥은 약 60여 호 가량이다.

한편, 마을에 터를 잡은 광주 이씨는 조선 후기 영남학파와 남인계를 주도한 인물을 다수 길러낸 영남의 대표 가문으로 이 마을에서만 문과 장원을 포함하여 과거 급제자 22명을 배출하였다. 이런 이유로 이 마을을 ‘장원방(壯元坊)’이라고 불렀으며, 마을 동쪽에 있는 산을 ‘장원봉(壯元峰)’이라고 한다. 이 밖에 당대 영남학파 명가들과 혼인 관계를 맺었으며 특히 근기남인*의 주요 명가와 혼인으로 맺은 유대 관계는 영남 지역의 다른 남인 가문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 매화낙지형(梅花落地形): ‘매화가 땅에 떨어지는 형국’으로, 풍수지리학에서는 매화가 떨어진 자리에 그 향기가 세상에 진동하는 것과 같이 이런 지형에서는 세상을 교화할 수 있는 훌륭한 인물이 나온다고 한다.
  • 이윤우(李潤雨, 1569~1634): 호는 석담(石潭). 1569년(선조 2)에 태어나 1591년(선조 24)에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1606년(선조 39)에 문과 급제하였다. 광해군 때 사관(史官)으로서 정인홍의 비위 사실을 직필했다가 탄핵을 받아 사직했다. 이후 수성도찰방(輸城道察訪), 경성판관(鏡城判官)을 역임하였으나 대북(大北)의 전횡이 심해지자 사직했다. 인조반정 뒤 이조정랑 등을 거쳐 공조참의에 이르렀고, 사후 이조참판이 추증되었다.
  • 이원록(李元祿, 1629~1688): 호는 박곡(朴谷). 미수 허목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1648년(인조 26)에 향시 합격하였다. 1651년(효종 2)에 생원시에 장원 합격하고, 1663년(현종 4)에 을과 장원으로 문과에 합격하였다. 성균관 전적, 형조좌랑, 병조참의, 경상도관찰사, 예조참판을 거쳐 대사헌을 다섯 차례나 역임하였다. 경신참화로 1681년에 안동 박곡으로 옮겨 은둔하였고 마을 이름을 따서 호를 지었다고 한다. 1688년(숙종 14)에 사망하자 숙종이 제문을 지어 내렸는데 제문에는 “천성적으로 타고남이 성실하고 정성스러워 시문에 모범이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 근기남인: 남인(南人)은 조선 시대 붕당 중 하나인 동인(東人)에서 분파하였으며, 학문적으로는 이황의 학통을 잇고, 지역적으로는 안동을 중심으로 하는 경북지역과 서울·경기권을 주요 근거지로 삼아 활동하였다. 영남지역의 남인을 ‘영남(嶺南)’, 서울·경기지역의 남인을 ‘경남(京南)’ 혹은 ‘근기남인(近畿南人)’이라고 한다.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칠곡 매원마을은 17세기 초부터 광주이씨가 대대로 살아온 집성촌이다. 조선시대의 문신 이윤우(1569-1634)는 원래 이 마을에서 남동쪽으로 약 6km 떨어진 신리 웃갓마을 종가에 살고 있었는데, 장남 이도창(1595-1659)을 종가에 남겨두고 둘째 아들 이도장(1603-1644, 호: 낙촌)과 셋째 아들 이도장(1607-1677, 호: 감호당)과 함께 이 마을에 정착하였다. 이후 낙촌의 후손들이 마을의 중앙과 동쪽에, 감호당의 후손들이 마을 서쪽에 자리를 잡으면서 마을의 영역이 동서 방향으로 확장되었다.

이 마을은 안동 하회마을, 경주 양동마을과 함께 경상도 지역의 3대 반촌(班村) 중 하나이다. 광주이씨는 조선 후기 경상도 지방의 성리학파를 이끌던 주요 인물들을 다수 길러낸 대표적인 가문이며, 이 마을에서만 과거 급제자 22명이 배출되었다. 광주이씨는 경상도, 서울, 경기 지역의 당대 명가들과 혼인을 통해 유대 관계를 맺으며 사회적, 학문적 기반을 확대하였다.

마을의 북쪽에는 마을의 주산에 해당하는 용두산이 있고 왼쪽과 오른쪽에는 각각 죽곡산과 산두산이 마을을 감싸고 있으며, 마을 앞으로는 동정천이 흐르는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지형이다. 풍수지리상 이 마을은 ‘매화 꽃잎이 떨어져 흩어진 것과 같은 형국’이라고 하며, 이러한 지형에서는 매화가 떨어진 자리에 그 향기가 세상에 진동하는 것과 같이 세상을 교화할 수 있는 훌륭한 인물이 나온다고 여겨진다. 또한 매원이라는 마을의 이름은 매화와 매실이 많았던 이 마을에 여행객의 숙식 편의를 제공하던 ‘원(院)’이 있었다는 점에서 유래되었다고도 한다.

기록에 따르면 마을 남쪽에 사창(社倉)이 있었으며, 20세기 초 마을이 가장 번성하였을 때에는 420여 호 이상의 기와집과 180여 호의 초가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전쟁 당시 매원마을에 주둔한 북한군을 공격하려고 유엔군이 대규모 폭격을 가해 가옥 대부분이 불에 타 없어졌다. 현재 남아 있는 전통 가옥은 약 60여 호 가량이고, 대부분 19세기 이후에 건립되었다. 이 가옥들은 안채, 사랑채, 곳간채, 아래채 등이 안마당을 중심으로 ㅁ자형을 이루는 것이 많다. 특히 안마당 좌우로 곳간채, 광 등 별도의 저장 공간이 배치된 점은 19세기 이후 농업을 기반으로 한 부농층의 주거 배치 형태와 비슷하다. 이것은 신분보다는 경제력에 따라 건축 형태가 달라지는 당시 사회상을 입증하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갤러리

참고자료

주석

  1. 『경북 칠곡 매원마을 국가등록민속마을 등록 신청 자료보고서』, 칠곡군청, 2022, 11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