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 금성관
나주 금성관 Geumseonggwan Guesthouse, Naju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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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나주 금성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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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Geumseonggwan Guesthouse, Naju |
한자 | 羅州 錦城館 |
주소 | 전라남도 나주시 금성관길 8 (과원동, 나주금성관) |
지정(등록) 종목 | 보물 제2037호 |
지정(등록)일 | 2019년 10월 25일 |
분류 | 유적건조물/정치국방/궁궐·관아/관아 |
시대 | 조선시대 |
제작시기 | 조선시대 성종 18년(1487)~20년(1489) |
수량/면적 | 1동(정청 603.19㎡, 월대(계단포함) 79.57㎡) |
웹사이트 | 나주 금성관,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목차
해설문
국문
2022
나주는 백제 때의 이름이 발라군이다. 물론 백체 이전에는 불미지국(이병도설)이 있었다고 추정한다. 통일 신라 때 금성군(금산), 903년에 지금의 이름인 나주가 되어 982년(성종2년) 나주목이 되었다가 1895년 지방제도 개편으로 나주관찰부(16개군 관할)가 설치되고 1896년 전국을 13도로 나누어 전라남도청이 광주에 설치 될 때까지 천여 년 간 남도의 중심도시였다.
이곳은 나주목관아 중심공간이었던 나주목객사 공간이다. 관아는 넓게 해석하면 읍성과 내부의 각종건물을 이르는 말이다. 객사는 관찰사가 관할구역을 순행할 때 업무를 보던 곳이요 중앙의 사신(事臣)이 지방에 오면 묵던 곳이었다. 특히 객사의 정청에는 전패를 모셔두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망궐례를 행하던 공간이었다. 다시 말해 사신을 접대하고(侍賓客), 왕정의 위덕을 펴서(宣威德), 관부의 위엄을 세우는(嚴官府) 곳이었다.
금성관 주변은 고려 때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금성관의 동익헌(벽오헌)은 전라도관찰사 이행(1403.1.11.~1404.5 재임)이 벽오헌이라고 이름을 지었다는 것으로 보아 고려 말 또는 조선초기부터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후 김춘경 목사와 오한 판관이 1480년 중수하였으며, 금성관은 이유인목사(1487.4.12.~1489 재임)가 망화루와 함께 건립하였다. 임란 때 피해를 입어 김개목사(1616.3.24.~1617.4 재임)가 1617년 4월 21일 중수하였고, 1775년 8월 30일 이명중목사(1775.3.14.~1776.7 재임)가 개수하였다. 이후 1963년 보수를 거쳐 1976년 완전 해체 복원하였다.
한편 일제강점기에 나주읍성과 나주목관아는 훼손되기 시작하였다. 일제는 나주목 당시의 동헌이었던 제금헌(製錦軒)을 나주군청사로 사용하였다. 매일신보 1919년 2월 4일자 나주군청과 창고이축 수리에 대해 도청에 보고하였다는 기사와 1920년에 발간된 『속수나주지』의 기록으로 보아 1919년에 금성관으로 군청사를 옮긴 것으로 확인된다. 군청으로 쓰이던 제금헌은 잠업전습소로 향사당은 금융조합으로 사용하다가 1926년 나신면사무소로 1943년 나주수리조함(해방 후 영산강농지개량조합-농업기반공사나주지사)으로 사용되다가 1973년에 목조팔작집은 없어졌다. 연청(椽廳)은 경찰서로 도청(都廳)은 지방법원출장소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일제는 군청사를 금성관으로 옮기면서 남문외장을 1920년 폐쇄하고 읍내장만 개장하였는데 이 때 시장터를 지금의 금계매일 시장 쪽으로 이전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금성관의 동.서익헌과 망화루 등은 일제 때 없어지고 금성관만 남았으나 이를 개조하여 사용함으로써 원형이 상실되었다. 금성관 앞쪽으로 나주군청사가 있었으나 2005년 철거하고 외삼문인 망화루를 복원하였으며 발굴조사 결과 월대와 박석 내삼문, 각종 부속건물지가 확인되었다. 나주시에서는 금성관 동.서익헌 복원 등 금성관 주변 복원 정비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2023
금성관은 왕권을 상징하는 지방 궁궐로 조선시대 나주목 객사 정청(政廳)의 이름이다. 손님을 접대하는 객사는 고려시대부터 있었으며 나주를 방문한 공주, 외국 사신, 다른 지방 관원 등이 머물렀다. 조선시대에 유교 이념이 뿌리내리기 시작하면서 의례 기능을 더해, 왕을 상징하는 전패와 궁궐을 상징하는 궐패를 정청에 모셔 놓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대궐을 향해 예를 올리는 망궐례를 행하였다. 이를 고려하여 정청을 중심에 두고 동서 양쪽에 중요한 손님을 접대하는 부속 건물(익헌)을 날개처럼 거느리는 구조를 갖추고 있다.
성종 때 목사 이유인이 금성관과 망화루를 지었고, 정유재란 이후 고종 대까지 금성관을 크게 고쳐 부속 건물, 연못, 수로 등을 정비하였다. 1909년 객사 제도가 폐지되면서 기능이 멈추었고, 1919년 이후 일제가 금성관을 나주군 청사로 사용하면서 나머지 건물은 헐어 없애거나 기능을 바꾸었다. 해방 후 1963년에 보수하고 1976년에 전체적으로 해체 복원하였으며, 2001년부터 나주목 관아 원형 복원 사업을 추진하면서 금성관을 가리고 있던 나주군 청사와 부속 건물을 철거하고 발굴 조사와 고증을 통해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금성관 편액은 1775년(영조 50) 이명중 목사가 개수할 때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글씨는 동국진체를 완성한 원교 이광사(圓嶠 李匡師, 1705~1777)가 쓴 것으로 연구되었으며, 조선시대 편액을 초서로 쓴 것이 매우 이례적이다. 가로 25.5㎝, 세로 175㎝의 장방형 판재 15개를 세로로 잇대서 평판을 만들었고, 5개의 판재마다 한 글자씩 새겨 놓았다.
금성관은 조선시대 객사 건축물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화려하며, 월대・입면・평면・천정을 궁전의 정전과 유사하게 구성한 점과 팔작지붕인 점이 특징이다. 2019년 천년 전라도 탄생지인 나주목의 상징성과 역사성, 나주만의 지역성을 인정받아 보물로 지정되었다.
금성관은 의향(義鄕) 나주를 상징하는 문화유산이다. 임진왜란 때 김천일 의병장이 전국 최초로 왕을 지키기 위해 근왕 의병을 일으킨 출정식의 현장이며, 구한말 명성황후 시해 때는 빈소가 차려져 항일 정신을 고취했던 장소이다. 또한 단발령에 항거한 의거의 현장이자 항일 나주학생독립운동의 현장이다.
- 전패(殿牌): 임금을 상징하는 ‘殿’자를 새겨 지방 고을의 객사 정청 안에 모신 나무패
- 궐패(闕殿): 궁궐을 상징하는 ‘闕’자를 새겨 지방 고을의 객사 정청 안에 모신 나무패
영문
Geumseonggwan Guesthouse, Naju
2022
A guesthouse, called gaeksa in Korean, was a part of a local government office during the Goryeo (918-1392) and Joseon (1392-1910) periods. The guesthouse consists of a shrine in the center, where a wooden tablet symbolizing the king was held, and a room to each side, which was used as temporary lodging for important guests or officials visiting the region on duty. The wooden tablet, enshrined in each local guesthouse, exhibited the king’s sovereignty across the country. To acknowledge this sovereignty, the local magistrate and other officials regularly performed a ceremony here in which they prostrated themselves toward the royal capital.
Geumseonggwan was the guesthouse of the Naju Local Government, located within Najueupseong Walled Town. The name Geumseonggwan means “Hall of Geumseong” and refers to a former name of the Naju area. During the Baekje kingdom (18 BCE-660 CE), the Naju area was known as Balla. During the Unified Silla period (668-935), it was first renamed Geumseong and then again renamed Naju in 903. In 982, during the early Goryeo period, the local government was promoted from a county to a prefecture.
It is unknown exactly when Geumseonggwan Guesthouse was first established. However, it is said that the eastern wing was named Byeogoheon by the provincial governor Yi Haeng circa 1403-1404, suggesting that this part of the guesthouse had already been built by the late Goryeo or early Joseon periods. The central shrine was later constructed circa 1487-1489 under the order of the local magistrate Yi Yu-in. Following significant damage during the Japanese invasions of 1592-1598, the building was repaired in 1617 by the local magistrate Kim Gae, and was later rebuilt in 1775 by the local magistrate Yi Myeong-jung. Naju remained the main city of the southern Jeolla region until the Jeollanam-do Provincial Government was established in Gwangju in 1896.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1910-1945), the walled town and government offices began to be damaged by Japanese authorities, who used the former magistrate’s office, Jegeumheon Hall, as the local administrative office. In 1919, the administrative office was moved to Geumseonggwan Guesthouse, and Jegeumheon Hall began to be used as a training center for silk farming. Other buildings were used as a police station and a local office of the district court. In 1920, the market outside the walled town’s South Gate was shut down and only the market inside the walled town remained in operation. It is presumed that the vendors of the market outside the walled down relocated, creating Geumgye Market. During the colonial period, the east and west wings of the guesthouse were demolished, as was its main gate, named Manghwaru Pavilion. Thus, the guesthouse lost its original appearance.
The area around Geumseonggwan Hall has undergone archaeological investigation and reconstruction since the early 2000s. In 2003-2005, the east and west wings, as well as Manghwaru Pavilion, were rebuilt. Naju-gun Office, which had been located directly in front of the guesthouse, was demolished in 2005, allowing for archaeological excavations to be conducted on the site. Findings revealed an inner gate with a wide platform and a stone pathway, as well as auxiliary building sites.
2023
영문 해설 내용
2022
객사는 고려와 조선시대에 고을 관아에 설치했다. 객사는 가운데에 왕의 전패를 모신 정청이 있고, 좌우 양쪽에는 공무로 출장 온 관원이나 고을을 찾은 중요한 손님들이 숙소로 사용되던 익헌이 있다. 객사에 모셔진 전패는 왕의 통치권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러한 통치권을 바탕으로 고을 수령과 관리들은 궁궐을 향해 절하는 망궐례를 행했다.
금성관은 나주읍성에 있던 나주목 관아의 객사이다. ‘금성’은 나주 지역의 옛 이름이다. 백제 때 나주 지역은 발라군이라 불렸다. 통일신라시대 때 금성군이 되었고, 903년 나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고려 초인 982년 나주목이 되었다.
금성관이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전라도관찰사 이행이 1403-1404년 무렵 금성관의 동익헌을 벽오헌이라고 이름 지었다는 것으로 보아, 동익헌은 고려 말 또는 조선 초기부터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정청은 목사 이유인이 1487-1489년 무렵 건립하였다. 임진왜란 때 파괴된 뒤 목사 김개가 1617년에 중수하였고, 1775년 목사 이명중이 고쳐 지었다. 나주 지역은 1896년 전라남도청이 광주에 설치될 때까지 남도의 중심도시였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나주읍성과 나주목 관아는 일제에 의해 훼손되기 시작하였다. 일제는 동헌이었던 제금헌을 나주군청사로 사용하였다. 1919년에는 금성관으로 군청사를 옮겼고, 제금헌은 잠업전습소로 쓰였으며, 관아 내의 여러 건물들은 경찰서와 지방법원출장소 등으로 사용되었다. 1920년 남문외장이 폐쇄되고 읍내장만 개장하였는데 이 때 시장터를 금계매일시장 쪽으로 이전한 것으로 추측된다. 일제강점기 때 금성관의 동.서익헌과 문루인 망화루가 없어지면서 금성관은 원형을 잃게 되었다.
금성관과 그 주변 지역에서는 2000년대 초부터 발굴조사와 복원작업이 진행되어 왔고, 2003-2005년 동·서익헌과 망화루가 복원되었다. 금성관 앞에 있던 나주군청사는 2005년에 철거되어 이 일대에 대한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발굴조사 결과 월대와 박석 내삼문, 각종 부속건물지가 확인되었다.
2023
객사는 고려와 조선시대에 고을 관아에 설치했다. 객사는 가운데에 왕의 전패를 모신 정청이 있고, 좌우 양쪽에는 공무로 출장 온 관원이나 고을을 찾은 중요한 손님들이 숙소로 사용되던 익헌이 있다. 객사에 모셔진 전패는 왕의 통치권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러한 통치권을 바탕으로 고을 수령과 관리들은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궁궐을 향해 절하는 망궐례를 행했다.
금성관은 나주읍성에 있던 나주목 관아의 객사이다. ‘금성’은 나주 지역의 옛 이름이다. 정청은 15세기 말 목사 이유인이 객사의 외삼문인 망화루와 함께 지었다. 임진왜란 때 파괴되었다가 1775년에 다시 지었고, 19세기 말까지 부속 건물, 연못, 수로 등이 정비되었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나주읍성과 나주목 관아는 일제에 의해 훼손되기 시작하였다. 1919년부터 금성관은 나주군 청사로 사용되었고, 이 무렵 동익헌, 서익헌과 망화루가 헐리고 금성관 앞에 다른 건물들이 세워지면서 객사는 원형을 잃게 되었다. 1945년 광복 이후, 금성관은 1963년에 보수하고 1976년에 해체 복원하였으며, 2001년부터 나주목 관아 원형 복원 사업을 추진하면서 일제시대에 세워졌던 건물들을 철거하고 발굴 조사와 고증을 통해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금성관 편액은 1775년 중수 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글씨는 학자이제 서예가였던 이광사(1705-1777)가 썼다. 조선시대 편액을 초서로 쓴 것이 매우 이례적이다. 가로 25.5㎝, 세로 175㎝의 장방형 판재 15개를 세로로 잇대서 평판을 만들었고, 5개의 판재마다 한 글자씩 새겨 놓았다.
금성관은 조선시대 객사 건축물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화려하며, 월대・입면・평면・천정을 궁전의 정전과 유사하게 구성한 점과 팔작지붕인 점이 특징이다. 2019년 천년 전라도 탄생지인 나주목의 상징성과 역사성, 나주만의 지역성을 인정받아 보물로 지정되었다.
금성관은 의향(義鄕) 나주를 상징하는 문화유산이다. 임진왜란 때 김천일 의병장이 전국 최초로 왕을 지키기 위해 근왕 의병을 일으킨 출정식의 현장이며, 구한말 명성황후 시해 때는 빈소가 차려져 항일 정신을 고취했던 장소이다. 또한 단발령에 항거한 의거의 현장이자 항일 나주학생독립운동의 현장이다.
갤러리
나주 금성관 전체 배치도[1]
참고자료
- “조선 시대 객사 「나주 금성관」보물 지정”, 문화재청 보도자료, 2019.10.25. http://www.cha.go.kr/newsBbz/selectNewsBbzView.do?newsItemId=155701721§ionId=b_sec_1&pageIndex=1&strWhere=&strValue=&mn=NS_01_02
- 『2019년도 문화재위원회 제8차 건축문화재분과위원회 회의록』, 문화재청, 2029.08.22. https://www.cha.go.kr/cop/bbs/selectBoardArticle.do?nttId=74996&bbsId=BBSMSTR_1019&mn=NS_03_03_04
- 『나주목 관아와 향교 정밀실측조사보고서(상, 하)』, 문화재청, 2015. https://www.cha.go.kr/cop/bbs/selectBoardArticle.do?nttId=29597&bbsId=BBSMSTR_1021&mn=NS_03_08_01
주석
- ↑ 『나주목 관아와 향교 정밀실측조사보고서(하)』, 문화재청, 2015, 24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