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댁(아산 외암마을)
교수댁 敎授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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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안내판: 아산 외암마을 |
해설문
국문
교수댁은 조선 시대 말에 무과에 급제한 후 성균관 대사성, 명성황후 혼전향관(魂殿享官), 탁지부 협판, 궁내부 특진관 등을 지냈고, 독립운동을 하다 순국한 퇴암(退庵) 이성렬(李聖烈, 1888∼1913)이 살던 집이다. 훗날 성균관 교수를 지낸 이용구(李用龜, 1854∼?)가 이 집에 살았다고 해서 ‘교수댁’으로 불린다.
원래 사랑채, 안채, 행랑채, 별채가 있었으나 지금은 안채와 행랑채, 사당만 남아 있다. 사랑채가 없어지기는 했지만 이 집도 마을의 다른 집처럼 ‘┛’자 모양의 사랑채를 두고 뒤쪽에 ‘┏’ 자 모양의 안채를 둔 ‘ㅁ’자 모양의 집이다.
교수댁의 정원은 건재고택, 송화댁과 함께 외암마을을 대표한다. 정원의 크기는 건재고택이나 송화댁보다 작지만, 다른 지방의 양반집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아름다움을 보여 준다. 설화산에서 흘러들어온 수로를 마당으로 끌어들여 휘돌아 나가게 하는 연못을 만들었으며,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목을 정원수로 삼아 자연친화적인 요소를 강조하였다.
교수댁의 사랑채 정원은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가까이에 자리를 잡은 건재고택의 사랑채 정원과 마찬가지로 연못과 견수로(遣水路)*로 구성되어 있다. 연못은 구부러진 곡지(曲池) 형태이며 돌로 호안**을 쌓았다. 견수로는 본래 있던 농수로를 다듬은 것으로 자연석을 쌓아 산속의 물길처럼 만들었다. 견수로에는 배 모양의 주선석(舟船石)을 놓아 물을 헤치며 올라가는 배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였다. 견수로에 놓은 다리는 정원을 한 바퀴 돌아볼 수 있도록 만든 장치이며, 폭포는 물소리를 들으면서 물이 떨어지는 모습을 볼 수 있도록 만든 경관 요소이다. 연못과 견수로 주변에는 다양한 수목을 심어 관상의 대상으로 삼았으며, 정원에서 자연적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도록 하였다.
- 견수로(遣水路): 연못으로 물을 끌어들이는 물길
- 호안: 흐르는 물로부터 제방을 보호하기 위해 쌓은 구조물
영문
영문 해설 내용
교수댁은 이성렬(1888-1913)이 살던 집이다. 이성렬은 조선 말 고위 관직을 지내고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하다 순국하였다. 이후 이용구(1854-?)가 이 집을 인수하여 살게 되었는데, 그가 성균관에서 유생들의 교육을 담당하는 교수를 지냈기 때문에 교수댁으로 불린다.
원래는 ㄱ’자 모양의 안채와 사랑채가 안마당을 중심으로 ‘ㅁ’자 모양을 이루고, 행랑채, 별채, 사당까지 갖춘 큰 규모의 집이었다. 지금은 안채, 행랑채, 사당만 남아있지만, 사랑채 앞에 조성된 정원은 건재고택, 송화댁의 정원과 함께 외암마을을 대표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 정원은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건재고택, 송화댁의 정원과 마찬가지로 물길과 연못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크기는 조금 작다. 설화산에서 흘러내려온 물을 마당으로 끌어들여 휘돌아 나가도록 수로를 놓았는데, 이 수로는 원래 있던 농수로를 다듬은 것으로 자연석을 쌓아 산속의 물길처럼 만들었다. 물길에는 배 모양의 돌을 놓아 물을 헤치며 올라가는 배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였다. 또한 정원을 한 바퀴 돌아볼 수 있도록 물길에 다리를 설치했고, 물이 떨어지는 모습을 볼 수 있도록 폭포를 만들기도 하였다. 물길과 연못 주변에는 다양한 나무를 심어 자연적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도록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