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 당성
화성 당성 Dangseong Fortress, Hwaseo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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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화성 당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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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Dangseong Fortress, Hwaseong |
한자 | 華城 唐城 |
주소 |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 산32번지 |
지정(등록) 종목 | 사적 제217호 |
지정(등록)일 | 1971년 4월 15일 |
분류 | 유적건조물/정치국방/성/성곽 |
시대 | 삼국시대 |
수량/면적 | 211,595㎡ |
웹사이트 | 화성 당성,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해설문
국문
당성은 서해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서신면 상안리의 해발 159m 구봉산 정상부와 그 서쪽에 발달된 능선에 쌓은 테뫼식*의 1차성과 구봉산 정상부와 그 동쪽의 능선 및 계곡을 포함하는 곳에 쌓은 포곡식**의 2차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1차성은 신라가 이 지역을 차지하고 쌓았으며 통일신라 말부터 고려 초까지 사용되었다. 평면은 동서로 긴 네모꼴에 가깝지만 성벽의 모서리 부분은 돌출된 모습이다. 성의 둘레는 약 610m, 내부 면적은 약 14,300㎡이다. 성벽은 암반을 ‘⨽’자로 깎아낸 후 네모꼴의 돌을 다듬어 수직에 가깝게 쌓아 올렸으며, 그 안쪽은 돌로 채워 넣었다. 원래 성벽의 최대 높이는 약 5~6m로 추정된다. 1차성 안에서는 여러 건물지와 집수지 등의 시설이 확인되었다. 주요 유물로는 성의 이름과 관련된 ‘당(唐)’자가 들어간 기와를 비롯하여 다수의 명문 기와, 토기와 도기가 출토되었으며 이 밖에 중국산 자기 등이 확인되었다.
2차성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 중국과의 교류가 증가하면서 협소한 1차성을 대체하기 위하여 쌓았으며 조선시대 초까지 사용되었다. 성의 평면은 네모꼴에 가까운데 그 둘레는 약 1,170m, 내부 면적은 약 72,600㎡이다. 최초 성벽은 바닥을 편평하게 만든 후 중심부에 돌을 일정하게 깔고 그 위로 흙을 다져 쌓은 후 그 안과 밖에 다시금 흙을 다져 덧붙였다.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의 최대 높이는 3m 정도이다. 성벽은 이후 고려시대에 이르러 최초 성벽의 일부를 잘라내고 돌을 이용하여 수직으로 새롭게 쌓았다. 2차성에서는 서문지, 북문지, 동문지가 확인되었으며 성 안에서는 여러 건물지와 집수지, 연못지 등이 조사되었다. 출토된 유물로는 통일신라~조선시대에 속하는 다수의 기와와 도기가 있으며 중국계 자기 등이 일부 있다.
당성이 자리 잡은 곳은 처음에 백제의 영역이었다가 고구려를 거쳐 신라가 점령하였다. 신라는 553년 한강 유역을 차지한 후 당성을 쌓고 바닷길을 통해 중국의 당나라와 정치 · 외교 · 군사 및 문물 교류를 진행하였는데, 고려 초까지 대중국 교역의 중심지로 활용되었다.
당성은 신라의 삼국 통일 과정에서 핵심적 전초 기지로 활용되었고, 서역에서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로 이어지는 문화 교류의 기착지라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 테뫼식(山頂式): 산 정상부만을 둘러쌓은 방식
- 포곡식(包谷式): 산 정상부와 그 주변의 계곡부를 넓게 둘러쌓은 방식
영문
영문 해설 내용
당성은 서해를 내려다 볼 수 있는 화성 상안리의 구봉산(해발 159m) 정상부와 그 서쪽에 발달된 능선에 쌓은 1차성과 구봉산 정상부와 그 동쪽의 능선 및 계곡을 둘러 쌓은 2차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당성이 자리 잡은 곳은 원래 삼국시대 백제의 영역이었는데, 5세기 후반 고구려가 차지하였다가, 6세기 중반 신라가 점령하게 되었다. 신라는 당성을 거점으로 하여 바닷길을 통해 중국의 당나라와 정치, 외교, 군사, 문물의 교류를 진행하였으며, 당성은 고려 초까지 대중국 교역의 중심지로 활용되었다.
1차성은 신라가 쌓은 성으로 고려 초까지 사용되었다. 평면은 동서로 긴 네모꼴에 가깝고 성벽의 모서리 부분은 돌출된 모습이다. 성의 둘레는 약 610m, 내부 면적은 약 14,300㎡이다. 성벽은 암반을 ‘⨽’자로 깎아낸 후 네모꼴의 돌을 다듬어 수직에 가깝게 쌓아 올렸으며, 그 안쪽은 돌로 채워 넣었다. 원래 성벽의 최대 높이는 약 5~6m로 추정된다. 1차성 안에서는 여러 건물지와 집수지 등의 시설이 확인되었다. 주요 유물로는 ‘당(唐)’자가 새겨진 기와를 비롯하여 다수의 명문 기와, 토기와 도기, 중국산 자기 등이 출토되었다.
2차성은 7세기 후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 중국과의 교류가 증가하면서 협소한 1차성을 대체하기 위하여 쌓았으며 조선시대 초까지 사용되었다. 성의 평면은 네모꼴에 가까운데 그 둘레는 약 1,170m, 내부 면적은 약 72,600㎡이다. 최초 성벽은 바닥을 편평하게 만든 후 중심부에 돌을 일정하게 깔고 그 위로 흙을 다져 쌓은 후 그 안과 밖에 다시금 흙을 다져 덧붙였다.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의 최대 높이는 3m 정도이다. 성벽은 이후 고려시대에 이르러 최초 성벽의 일부를 잘라내고 돌을 이용하여 수직으로 새롭게 쌓았다. 2차성에서는 서문지, 북문지, 동문지가 확인되었으며 성 안에서는 여러 건물지와 집수지, 연못지 등이 조사되었다. 출토된 유물로는 통일신라~조선시대에 속하는 다수의 기와와 도기가 있으며 중국계 자기 등이 일부 있다.
당성은 신라의 삼국 통일 과정에서 핵심적 전초 기지로 활용되었고, 서역에서 중국을 거쳐 한국으로 이어지는 문화 교류의 기착지라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