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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공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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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공산성
Gongsanseong Fortress, Gongju
공주 공산성,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공주 공산성
영문명칭 Gongsanseong Fortress, Gongju
한자 公州 公山城
주소 충청남도 공주시 산성동 2번지
지정(등록) 종목 사적 제12호
지정(등록)일 1963년 1월 21일
분류 유적건조물/정치국방/성/성곽
시대 삼국시대
수량/면적 376,645.3㎡
웹사이트 공주 공산성,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기존 국문

주춧돌을 사용하지 않고 땅에 구멍을 파 직접 기둥을 세운 굴건식((掘建式) 건물터이다. 1990년 발굴 조사로 건물터 2곳과 구덩이 9개를 확인하였다.

이 건물터는 475년에 백제가 웅진으로 도읍을 옮기기 전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건물이 세워졌었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웅진천도 이전의 공산성 역사를 밝히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지자체 제공 안내판 타이틀 : 공산성 백제 건물지 / 확인 필요>

수정 국문

초고

산성은 적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산의 정상부나 사면을 이용해 쌓은 성으로, 쌓은 방식에 따라 목책(木柵), 토루(土壘), 석축(石築) 등으로 구분된다.

공주 공산성은 공주시 산성동에 위치한 산성이다. 해발 110m인 공산(公山)의 정상에서 서쪽의 봉우리까지 에워싼 포곡식(包谷式) 산성이며, 성의 둘레는 2450m이다. 평면으로는 동서 약 800m, 남북이 약 400m이며 사방에 석벽이 남아 있다. 본래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으나 조선 중기에 석성으로 개축되었다. 성벽의 부속 시설로는 남문인 진남루(鎭南樓)와 북문인 공북루(拱北樓)가 남아있으며, 적에게 보이지 않게 누각없이 만든 암문(暗門), 성벽을 돌출시켜 쌓은 치성(雉城), 고대(高臺)·장대(將臺)·수구문(水口門) 등의 방어시설도 남아 있다.

공산성은 백제시대 축성된 산성으로 백제 때에는 웅진성으로 불렸다가 고려시대 이후 공산성으로 불리게 되었다. 475년(문주왕 1) 한산성(漢山城)에서 웅진(熊津)으로 천도하였다가 538년(성왕 16)에 부여로 천도할 때까지 64년간의 도읍지인 공주를 수호하기 위하여 축조한 것으로, 산성을 쌓은 정확한 연대 파악은 어려우나 문주왕 이후 성왕 이전까지 수도 웅진을 수비하기 위하여 여러 성을 쌓았던 동성왕 때로 추측하고 있다.

공산성은 백제시대는 물론 조선시대까지 지방행정의 중심지였다. 곧 백제가 멸망한 직후에는 의자왕이 잠시 거처하였고, 이곳을 거점으로 나당연합군에 대항하는 백제부흥운동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그 뒤 822년(헌덕왕 14)에 김헌창(金憲昌)이 일으켰던 반란은 이곳에서 진압되었고, 1623년에 이괄(李适)의 난 때 인조가 잠시 피난하기도 하였다.

<이슬 수정본>

공산(해발 110m)의 정상과 서쪽 봉우리를 둘러 쌓은 산성이다. 백제가 웅진(지금의 공주) 지역에 도읍을 두고 있었던 5세기 무렵에 도성을 방비할 목적으로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는 기원전 18년 한성(지금의 서울) 지역을 중심으로 건국되었다가, 475년에 웅진(지금의 공주) 지역으로 도읍을 옮겼고, 538년에 사비(지금의 부여)로 다시 도읍을 옮겼다.

본래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으나 조선 중기에 석성으로 개축되었으며, 사방에 성벽이 잘 남아 있다. 남문인 진남루(鎭南樓)와 북문인 공북루(拱北樓)가 남아있었고 1993년 동문터에 영동루를, 서문터에 금서루를 복원하였다.

성벽 주위에서는 적에게 보이지 않게 누각없이 만든 암문(暗門), 성벽을 돌출시켜 쌓은 치성(雉城), 적의 움직임을 살피기 위해 높게 쌓은 고대(高臺)와 장대(將臺), 밖으로 물을 빼는 수구문(水口門) 등의 방어시설이 있었던 흔적들이 발견되었다.

성 안에서도 70여개 동의 관련 건물지 및 축대, 배수로 등이 확인된 백제 왕궁지를 비롯해 연못지, 창고지 등 다양한 유적들이 확인되었으며,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시기의 기와 및 토기 등의 유물들이 많이 출토되었다.

이 성은 조선시대에도 군사적 요충지로 활용되어 1603년 충청도 관찰사 유근에 의해 충청 감영이 자리잡기도 했으며, 1623년 이괄(李适)의 난 때 인조가 잠시 피난하기도 하였다.

공산성은 백제가 멸망한 직후 의자왕이 잠시 거처하였고, 이곳을 거점으로 나당연합군에 대항하는 백제부흥운동이 벌어지기도 한 백제 문화의 중심지였다. 1980년부터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기 시작했으며,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성 안의 여러 유적들을 복원해왔다. 이러한 노력 끝에 2015년에는 '백제역사유적지구'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1차 수정

문맥요소

Nodes

ID Class Label Description
공산성 Place 공산성
유네스코 Actor 유네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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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Target Relation
공산성 유네스코 isRelateTo


참고자료

<추가>

  • 부여 청마산성 항목 참조 -> 백제는 기원전 18년 한성(지금의 서울) 지역을 중심으로 건국되었다가, 475년에 웅진(지금의 공주) 지역으로 도읍을 옮겼고, 538년에 사비로 다시 도읍을 옮겼다. / 이 산성은 월명산의 능선을 따라 쌓았다. 성벽의 여러 곳에서 치, 문이 있던 흔적, 밖으로 물을 빼는 수구가 확인되었다. 성 안에는 건물터, 적의 움직임을 살피기 위해 높게 쌓은 장대터, 고려시대로 추정되는 경룡사 등의 절터가 남아있다. 6-7세기에 만들어진 기와 조각뿐만 아니라 고려, 조선시대의 다양한 유물이 성 안에서 발견되었다.
  • 공산성 왕궁터에어 발경된 건물지 발굴로 찾아낸 성안마을의 흔적, 흥미진진 공주 공식블로그,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cyber_gongju/222224199592
  • 유네스코 세계유산, 공산성의 아침, 살며 사랑하며, 네이버 블로그, 2020.5.6. https://blog.naver.com/ssdkim121/221978879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