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서원(용인)
충렬서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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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충렬서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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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忠烈書院 |
주소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능원리 118 |
지정(등록) 종목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9호 |
지정(등록)일 | 1972년 5월 4일 |
분류 | 유적건조물/교육문화/교육기관/서원 |
수량/면적 | 1동 |
웹사이트 | 충렬서원,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해설문
국문
충렬서원은 동방 성리학의 조종으로 추송된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선생을 모시는 서원이다. 조선 선조 9년(1576) 정몽주와 조광조의 학덕과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이계, 이지를 비롯한 지방 유림들이 의논하여 서원을 세우고 위패를 모셨다.
처음에는 이 서원을 정몽주와 조광조의 묘소 중간 지역인 지금의 죽전동에 세웠으며 이름도 「죽전서원(竹田書院)」이었다. 임진왜란 때 서원 건물이 재가 되어 선조 38년(1605)에 이정구가 경기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현감 정종선, 이시윤과 등과 논의하여 정몽주의 묘소 아래에 중건하였다. 3년여의 공사 끝에 사우(祠宇) 3칸 동서재 각 2칸, 문루(門樓) 3칸을 지었다. 문루 위층은 강당이며, 아래는 문주방(門廚房)과 고사(庫舍) 등이 있다. 이때 조광조의 위패는 심곡서원으로 옮겨 모셨다. 중창과 함께 충렬(忠烈)이라 사액되었으며, 정몽주 선생의 손자인 설곡(雪谷) 정보(鄭保)와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한 죽창(竹窓) 이시직(李時稷)을 추가로 모셨다. 숙종 32년(1706)에 다시 후손 정제두 ‧ 정찬조를 비롯한 여러 유림들이 논의하여 옛터 서쪽에 가까운 곳으로 옮겼다. 그 후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고종 8년(1871)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1911년에 유림에서 사우를 중건하였고, 1956년에 강당을 복원하였다. 1972년 서원 전체를 보완하고 신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서원 안에는 6칸의 사우 내삼문(內三門)과 외삼문(外三門)이 있으며, 중앙에 마루가 있고 양쪽은 협실로 된 8칸짜리 강당 등이 있다. 입구에는 홍살문을 세워 서원을 신성시 하였다. 강당은 원내의 여러 행사를 치르고 유림의 화합 및 강론을 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특히 충렬서원은 일정한 중심축이 없어 외삼문에 들어서면 강당과 사당이 동시에 보인다. 한때 용인의 대학자 도암 이재 선생이 여러 유림과 학문을 교류하던 곳이기도 하나, 그 이후 교육 공간으로서의 역할은 거의 없었다. 1997년 유림의 결의로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3대 학자의 한 분으로 추송되는 추담(秋潭) 오달제(吳達濟) 선생을 추가로 모셨다. 매년 3월과 9월 중정(中丁)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