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충단비
장충단비 |
|
대표명칭 | 장충단비 |
---|---|
한자 | 奬忠壇碑 |
지정(등록) 종목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호 |
지정(등록)일 | 1969년 9월 18일 |
분류 | 기록유산/서각류/금석각류/비 |
시대 | 대한제국시대 |
수량/면적 | 석비 1基, 토지 1㎡ |
웹사이트 | 장충단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해설문
국문
장충단비는 을미사변 때 희생된 영령들을 위로하려고 장충단에 세운 비석이다. 1895년(고종 32) 을미사변 때 경복궁에 침입한 일본인들이 명성황후를 살해하였고 궁내부대신 이경직과 시위대장 홍계훈을 비롯한 많은 병사들이 일본군에 대항하다 죽었다. 고종황제는 1900년(광무 4)에 이들을 위하여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려고 장충단을 세우고 이때 비석도 함께 세웠다. 1910년 한일병합과 함께 일제에 의해 장충단은 폐지되고 비석도 뽑혔다. 1920년 후반부터 일제는 이곳에 벚나무를 심어 공원을 조성하고 이곳을 '장충단공원'이라 하였다. 1945년 광복과 함께 장층단비를 다시 찾아 지금의 신라호텔 자리에 세웠고, 1969년에 이곳으로 옮겼다. 비석의 앞면에 새겨진 '장층단(獎忠壇)' 세 글자는 당시 황태자였던 순종 황제가 쓴 글씨이다. 비석의 뒷면에는 당시 육군 부장이었던 민영환이 쓴 143자가 새겨져 있는데, 장충단을 세우게 된 내력과 의미를 담고 있다.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장충단비는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 때 희생된 사람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제단인 장충단에 1900년에 세운 비석이다.
1895년 10월 8일 새벽 경복궁에 침입한 일본인들은 고종의 왕후인 민씨(1897년 명성황후로 추존)를 참혹하게 살해하였다. 당시 궁내부 대신 이경직(1841-1895)과 시위대장 홍계훈(?-1895)을 비롯한 많은 병사들이 일본 침입자들에게 대항하다 죽었다. 고종은 1900년에 이들을 위하여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려고 장충단을 세우고 이때 비석도 함께 세웠다. ‘장충단’이라는 이름은 ‘충절을 권면하는 제단’이라는 뜻이다. 1910년 한일병합과 함께 일제에 의해 장충단은 헐렸고 비석도 뽑혔다. 1920년 후반부터 일제는 이곳에 벚나무를 심어 공원을 조성하고 이곳을 '장충단공원'이라 하였다. 1945년 광복과 함께 장층단비를 다시 찾아, 공원 맞은편에 있는 지금의 신라호텔 자리에 세웠다가, 1969년에 이곳으로 옮겼다.
비석의 앞면에 새겨진 이름은 비석 건립 당시 황태자였던 순종(재위 1907-1910)의 글씨이다. 비석의 뒷면에는 문신 민영환(1861-1905)이 쓴 143자의 비문이 새겨져 있는데, 장충단을 세우게 된 내력과 의미를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