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 화방사
남해 화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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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남해 화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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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南海 花芳寺 |
해설문
국문
남해 화방사는 여러 유·무형 문화재와 자연 유산을 보유하고 있는 전통 사찰이다. 화방사는 ‘남해 화방사 산닥나무 자생지’, ‘남해 화방사 채진루’ 등의 유형 문화재와 함께 지금까지 전승되어 오는 무형 문화재인 지역 사당패의 역사를 간직한 곳으로 남해 문화 역사의 산실이다.
신라 문무왕 때 원효 대사가 보광산(지금의 ‘금산’)에는 보광사를, 망운산 남쪽에는 이 절의 시작으로 알려진 연죽사를 지었다. 13세기에는 진각 국사 혜심이 연죽사를 지금 위치에서 서남쪽으로 400m 떨어진 곳으로 옮기고 ‘영장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후 임진왜란 때 사라져 없어진 것을 조선 인조 14년(1636)에 서산 대사의 제자인 계원 스님과 영철 스님이 지금 위치에 옮겨 고쳐 짓고, 지형이 연꽃 모양을 하고 있어 절의 이름을 ‘화방사’라고 지었다. 1984년에는 화재로 소실된 보광전을 복원하고 ‘대웅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호국 사찰로 이름 높은 화방사는 임진왜란 당시 승병들의 근거지로 사용되었으며 오랫동안 이순신 장군의 제사를 지내 왔다. 또한 화방사의 승장*과 승려들은 남해 충렬사 옆 호충암을 지키기도 하였다. 화방사 채진루에는 1997년에 남해 충렬사의 ‘충무이공묘비’를 똑같은 크기로 복원한 목판비가 서 있다.
한편 화방사에는 종이를 만드는 시설이 있어 종이를 대량으로 생산하였는데, 「각항 진상지의 본전에 대한 순영방의 등서」에 따르면 종이의 종류와 품질에 따라 값을 매겼다고 한다. 또한 화방사는 「중건중수기」, 「현판기문」 6편, 「완문절목」 13편, 「선생안」 7편 등의 기록물을 소장하고 있어서 남해의 역사와 불교사를 연구하는 데에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 승장: 승려들로 구성된 군대의 장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