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 삼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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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 삼인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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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순창 삼인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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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淳昌 三印臺 |
주소 | 전라북도 순창군 팔덕면 청계리 산271번지 |
지정(등록) 종목 |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7호 |
지정(등록)일 | 1973년 6월 23일 |
분류 | 유적건조물/인물사건/인물기념/생활유적 |
시대 | 조선시대 |
수량/면적 | 1기 |
웹사이트 | 순창 삼인대,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해설문
국문
삼인대는 중종 10년(1515)에 중종반정 직후 7일 만에 폐위되었던 단경왕후 신씨(端敬王后 愼氏)의 복위를 주청하는 상소를 올린 순창군수 김정(金淨), 담양부사 박상(朴祥), 무안현감 류옥(柳沃)의 행적을 기념하기 위한 곳이다. 삼인이란 명칭은 세 개의 직인(職印)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
단경왕후 신씨는 폐위된 연산군(燕山君)의 처남으로 중종반정 때 피살된 좌의정 신수근(愼守勤)의 딸이며, 후환을 염려한 반정공신 박원종(朴元宗) 등에 의해 폐출되었다. 그 후 새로 왕비가 된 장경왕후 윤씨(章敬王后 尹氏)가 세상을 떠나자 이 세 사람은 각자의 직인을 소나무 가지에 걸고, 관직에서 물러남은 물론 죽음을 각오하며, 폐비 신씨의 복위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이들의 뜻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유배(流配, 죄인을 먼 곳으로 보내 그곳에 거주하게 함)에 처해지는 형벌을 받았다.
그 후 영조 20년(1744)에 호남과 순창지역의 유림들은 이들을 추모하기 위해 비와 함께 비각을 세우고 삼인대라고 불렀으며, 비문은 이재(李縡)가 지었고, 전액*은 유척기(兪拓基)가, 글씨는 민우수(閔遇洙)가 썼다.
- 전액(篆額) : 전자체(篆字體)로 비석의 윗부분이나, 머릿돌에 비의 명칭을 새긴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