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 척화비
연기 척화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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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연기 척화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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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燕岐 斥和碑 |
주소 | 세종특별자치시 연기면 교촌3길 13 (연기향교) |
지정(등록) 종목 | 세종특별자치시 기념물 제11호 |
지정(등록)일 | 2016년 2월 11일 |
분류 | 유적건조물/정치국방/근대정치국방/기타 |
시대 | 조선시대 |
수량/면적 | 1기 |
웹사이트 | 연기 척화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해설문
국문
척화비는 흥선대원군이 1871년(고종 8년)에 세운 비석이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이후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강화하고 제국주의 열강의 조선 침략을 배격하겠다는 굳은 결의를 나타내었다. 이러한 내용을 모든 백성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당시 전국의 중요한 곳에 척화비를 세웠다.
연기 척화비는 연기향교 서쪽 담장을 따라 세워진 비석들 사이에 있으며, 너비 80cm, 폭 53cm 크기의 비석 받침에 세워져 있다.
척화비에는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곧 화의하는 것이요, 화의를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라는 뜻의 12자가 새겨져 있다.
영문
Anti-appeasement Stele, Yeongi-myeon
This is one of the many anti-appeasement steles set up across the country in 1871.
Following devastating armed conflicts on Korean soil with France in 1866 and the United States in 1871, Heungseon Daewongun (1820-1898), the prince regent and de facto ruler during the early period of the King Gojong’s reign (r. 1863-1907), ordered these steles be erected to warn people against opening Korea to Western powers. Each stele bears twelve Chinese characters that read: “The Western barbarians have invaded. To not fight is to advocate peace. To advocate peace is to sell out the country.” Next to this admonition are small characters that read: “Let this be a warning to our offspring for the next ten-thousand years.” After King Gojong took control of state affairs, Korea opened itself to foreign exchange, and most such steles were taken down. Over 20 of them survived to this day and have been designated as cultural heritages.
- 안내판 크기를 고려할 때, 기존 척화비 설명을 줄이는 것이 좋겠음.
영문 해설 내용
이 비석은 1871년 전국에 세워졌던 여러 척화비 중 하나이다.
조선 고종(재위 1863-1907)의 친부이자 당시 실권자였던 흥선대원군(1820-1898)은 1866년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 등을 치른 뒤, 서양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을 경계하고자 전국에 척화비를 세울 것을 명하였다. 척화비에는 ‘서양의 오랑캐가 침입해오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고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는 내용의 열두 글자를 크게 새겼고, 그 옆에 ‘우리들 만대 자손에게 경고한다’는 내용이 작은 글자로 새겨져 있다. 이러한 척화비는 고종이 친정을 하게 된 후, 조선이 문호를 열게 되면서 대부분 철거되었다. 현재 전국에 남아있는 20여 기의 척화비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연기 척화비는 받침돌과 몸돌로 이루어져 있다. 받침돌은 땅속에 묻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