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진 대풍헌
울진 대풍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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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울진 대풍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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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蔚珍 待風軒 |
주소 | 경상북도 울진군 구산봉산로 105-2 (기성면, 대풍헌 기성구산동회관) |
지정(등록) 종목 | 경상북도 기념물 제165호 |
지정(등록)일 | 2010년 3월 11일 |
분류 | 유적건조물/주거생활/주거건축/주거시설 |
시대 | 조선시대 |
수량/면적 | 1동(56.46 제곱미터) |
웹사이트 | 울진 대풍헌,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해설문
국문
대풍헌이라는 이름은 ‘바람을 기다리는 집’이라는 뜻이다. 이곳은 조선 후기에 구산포에서 울릉도로 가는 수토사(搜討使: 울릉도에 몰래 들어간 주민을 육지로 데리고 나오거나 일본인을 수색하여 토벌하는 군사)들이 배를 띄우기 전에 순풍(順風)을 기다리며 항해를 준비하던 곳이다.
대풍헌이 처음 세워진 연대는 알 수 없다. 다만 「구산동사중수기(龜山洞舍重修記)」에 조선 철종 2년(1851)에 대풍헌을 고쳐 지으면서 ‘龜山洞舍(구산동사)’와 ‘待風軒(대풍헌)’이라는 현판(懸板)을 걸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후 1906년에 다시 한 차례 고쳐 지었고, 2010년에는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했다.
건물은 남쪽 방향으로 서 있으며 지붕의 형태는 홑처마 팔작기와지붕이다. 건물 구조는 정면 네 칸, 왼쪽 네 칸, 오른쪽 세 칸 규모의 일자형(一字型) 이며, 큰마루와 온돌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큰마루에는 건물의 내력과 수토(搜討) 등에 관한 여러 현판이 걸려 있다.
조선은 숙종 19년(1693)에 일어난 안용복의 1차 도일(渡日: 일본으로 건너감) 사건 이후 울릉도에 수토관(搜討官)을 정기적으로 파견하였는데, 수토 제도는 약 200년 동안 계속되었다. 대풍헌에서 이와 관련된 「수토절목(搜討節目)」, 「완문(完文)」 등의 고문서도 발견되었다.
대풍헌과 이곳의 현판 및 고문서들은 오래전부터 조선이 울릉도·독도를 공식적으로 지키고 관리해 왔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증명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영문
영문 해설 내용
대풍헌은 조선 후기 구산포에서 울릉도로 가는 수토사들이 배를 띄우기 전에 순풍을 기다리며 항해를 준비하던 곳이다. 대풍헌이라는 이름은 “바람을 기다리는 집”이라는 뜻이다.
수토사는 “수색하고 토벌하는 군사”라는 뜻으로 조선 조정에서 울릉도에 정기적으로 파견하던 수군이다. 1693년 울릉도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 안용복이 일본 어부들과 조업권을 두고 실랑이를 벌이다 일본으로 끌려갔고, 이후 조선과 일본은 울릉도를 두고 분쟁을 벌였다. 이에 조선은 1694년부터 약 200여 년간 수토사를 파견하였고, 울릉도에 몰래 들어간 주민을 육지로 데리고 나오거나 일본인을 수색하여 토벌하였다.
대풍헌이 처음 세워진 연대는 알 수 없고, 1851년에 대풍헌을 고쳐 지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후 1906년에 고쳐 지으면서 원래의 구조가 변형되었다가, 2010년 해체하고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건물은 남쪽 방향으로 서 있으며 팔작지붕을 얹었다. 왼쪽의 대청과 오른쪽의 온돌방으로 구성되어 있고, 온돌방 앞에는 툇마루가 있다.
대청에는 건물의 내력과 수토 등에 관한 여러 현판이 걸려 있다. 이 현판들은 오래전부터 조선이 울릉도와 독도를 공식적으로 지키고 관리해 왔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증명하는 귀중한 자료이며, 2012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참고자료
- 울진대풍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4127
- 울진 대풍헌, 디지털울진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uljin.grandculture.net/uljin/toc/GC01800337
- “독도 지키던 조상의 얼 되살린다, 울진 ‘수토사’ 뱃길 재현”, 중앙일보, 2016.05.20. https://www.joongang.co.kr/article/20053348#ho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