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자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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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자고택
Songja House
송자고택,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송자고택
영문명칭 Songja House
한자 宋子古宅
주소 대전광역시 동구 진수2길 13 (소제동)
지정(등록) 종목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39호
지정(등록)일 1995년 5월 27일
분류 유적건조물/주거생활/주거건축/가옥
수량/면적 1동
웹사이트 송자고택,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송자고택은 우암 송시열(1607∼1689)이 효종 4년(1653)에 지어 거주했던 집이다. 송시열의 학덕을 기려 송자고택이라 부르는데,‘송자(宋子)’는 그의 문인들이 공자와 주자에 버금가는 성인으로 존칭한 데서 비롯되었다.

송자고택은‘ㄷ’자형 평면으로 전형적인 조선 중기의 사대부 가옥 안채 모습을 하고 있다. 중앙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서쪽에는 안방과 부엌을 두었고, 동쪽에는 건넌방을 두었다. 동쪽과 서쪽의 방 앞에는 각각 쪽마루가 있어 대청을 거치지 않고 접근할 수 있도록 하였다. 대청 앞의 다듬어진 커다란 돌 기단이 주목되는데, 건물의 규모나 양식에 비해 과도한 면이 있어 사찰 등에서 썼던 돌을 다시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는 사랑채, 별당, 행랑채, 사당 등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소제호가 매몰되고 이 일대의 택지가 개발되면서 행랑채와 사랑채 등이 헐리고 별당이었던 기국정(杞菊亭)이 동구 가양동의 남간정사 앞으로 옮겨지며 안채만 남게 되었다.

영문

Songja House

This house was built in 1653 by the renowned scholar and civil official Song Si-yeol (1607-1689), who lived here until 1661. The house’s name Songja means “Master Song,” referring to Song Si-yeol.

Song Si-yeol placed first in the classics licentiate examination in 1633. In 1635, he became the private teacher of Prince Bongnim (later King Hyojong, r. 1649-1659). Song briefly served in high-ranking official posts such as minister of punishments and second state councilor, to which he was appointed in 1658 and 1673, respectively. He spent the rest of his life in seclusion pursuing his studies. Song’s scholarly achievements made him one of the most influential figures in the political and philosophical circles of the Joseon period (1392-1910).

The house originally consisted of many buildings, but only women’s quarters remains. Some of the buildings were demolished in the 20th century due to urban development. Gigukjeong Pavilion, which served as the detached quarters of the house, was moved in 1926 to present-day Gayang-dong where it stands in front of Namganjeongsa Village Study Hall, which Song Si-yeol founded.

The women’s quarters has two perpendicular wings, which is a layout commonly seen in upper-class houses of the time. It consists of a wooden-floored hall in the center, a main underfloor-heated room and a kitchen on the left, and an auxiliary underfloor-heated room on the right. In front of the windows of both the main and auxiliary rooms, there is a narrow porch that allows one to exit the rooms without needing to pass through the wooden-floored hall.

영문 해설 내용

이곳은 조선시대의 학자이자 문신인 송시열(1607-1689)이 1653년에 지어 1661년까지 살던 집이다. 송자는 송시열을 존칭하는 이름이다.

송시열은 1633년 생원시에 장원급제하였고 1635년 봉림대군(후의 효종, 재위 1649-1659)의 스승이 되었다. 1658년에 이조판서, 1673년에 좌의정에 임명되는 등 잠시 관직을 지냈으나 평생 은거하며 학문에만 몰두하였으며, 학문적인 명성에 힘입어 조선 정치계와 사상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원래 이 고택에는 여러 건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안채만 남아 있다. 다른 건물들은 20세기 들어 이 일대가 개발되면서 헐렸고, 별당인 기국정은 송시열이 건립한 서당인 남간정사(지금의 가양동) 앞으로 1926년에 옮겨졌다.

안채는‘ㄷ’자형 평면으로 전형적인 조선 중기의 사대부 가옥 안채 모습을 보여준다.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안방과 부엌을 두었고, 오른쪽에는 건넌방을 두었다. 안방과 건넌방 앞에는 쪽마루를 두어, 대청을 거치지 않고도 이동할 수 있도록 하였다.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