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정처사 유허비
숭정처사 유허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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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숭정처사 유허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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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崇楨處士 遺墟碑 |
주소 | 경상북도 안동시 길안면 구수리 174 |
지정(등록) 종목 |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61호 |
지정(등록)일 | 1985년 8월 5일 |
분류 | 기록유산/서각류/금석각류/비 |
수량/면적 | 1기 |
웹사이트 | 숭정처사 유허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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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국문
유허비는 선인들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에 그들의 삶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석을 말한다. 숭정처사 유허비는 안동 출신의 학자 김시온(金是榲)을 기리기 위해 18세기에 세운 비이다. 원래 김시온이 머물던 와룡산 도연폭포 옆에 있었는데 임하댐이 건설되면서 1987년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김시온은 의성 김씨 중 안동에 처음으로 정착한 김만근의 5대손이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 이름이 높았으나 벼슬에는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만 힘썼다. 병자호란 이후에는 와룡산에 초당을 짓고 은거하며 후학을 양성하였다. 그는 “나의 묘에는 ‘숭정처사’라고 쓰라.”라는 유훈을 남겼다. ‘숭정’은 명나라의 마지막 연호이고, ‘처사’는 벼슬을 하지 않은 선비를 가리키는 말로서, ‘숭정처사’는 명나라에 대한 절의를 지키는 선비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 비는 사각형의 받침돌, 몸돌, 그리고 구름 문양을 새긴 머릿돌로 이루어져 있다. 비석의 앞면 가운데에 ‘숭정처사유허’라고 새기고, 네 면에 비문을 새겼다. 비문은 김시온의 손자 김태중과 가깝게 지냈던 이재가 숙종 43년(1717)에 지었고, 글씨는 김성일의 5대손인 김성월이 썼다. 비각 오른쪽에는 김태중이 김시온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자인 송정(경상북도 문화재자료)이 있다.
영문
Stele of Kim Si-on
This stele was erected in the 18th century to honor Kim Si-on (1598-1669), a scholar born in Andong. The stele was originally located next to Doyeon Falls on Waryongsan Mountain, where Kim lived in seclusion. In 1987, the stele was moved to its current location due to the construction of Imha Dam.
Kim Si-on was the fifth-generation descendant of Kim Man-geun (1446-1500), the first member of the Uiseong Kim Clan to settle in Andong. Known for his talents from an early age, Kim chose not to pursue an official career and instead devoted himself to his studies. When the Manchu Qing dynasty invaded Korea in 1637, Korea was forced to break its relations with the Chinese Ming dynasty and recognize Qing as its suzerain. In the aftermath of this humiliating surrender, Kim built a thatched dwelling on Waryongsan Mountain where he hid from the world and taught his students. In his will, Kim asked to be remembered by the posthumous name Sungjeongcheosa (崇禎處士), which can be interpreted as “the scholar who kept his loyalty to Ming.”
The stele consists of a rectangular pedestal, a body stone, and a capstone engraved with cloud designs. It has inscriptions on all four sides, with the title written in large characters down the center front. The inscriptions were composed in 1717 by Yi Jae (1657-1730), a close friend of Kim Si-on’s grandson Kim Tae-jung (1649-1711), and calligraphed by Kim Seong-wol (1659-1745), the fifth-generation descendant of the Andong-born civil official and scholar Kim Seong-il (1538-1593).
To the right of the stele is Songjeong Pavilion (Gyeongsangbuk-do Cultural Heritage Material), which was built in 1679 by Kim Tae-jung in honor of his grandfather.
- 비의 제목에 대한 내용은 굳이 쓸 필요가 없는 것 같아요.
영문 해설 내용
이 비석은 안동 출신의 학자 김시온(1598-1669)을 기리기 위해 18세기에 세워졌다. 원래 김시온이 머물던 와룡산 도연폭포 옆에 있었는데 임하댐이 건설되면서 1987년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김시온은 의성김씨 중 안동에 처음으로 정착한 김만근(1446-1500)의 5대손이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 이름이 높았으나 벼슬에는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만 힘썼다. 병자호란 이후에는 와룡산에 초당을 짓고 은거하며 후학을 양성하였다. 그는 생전에 “나의 묘에는 ‘숭정처사’라고 쓰라”는 뜻을 남겼다. ‘숭정’은 명나라의 마지막 연호이고, ‘처사’는 벼슬을 하지 않은 선비를 가리키는 말로, ‘숭정처사’란 명나라에 대한 절의를 지키는 선비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 비는 사각형의 받침돌, 몸돌, 구름 문양을 새긴 머릿돌로 이루어져 있다. 비석 앞면 가운데에는 ‘숭정처사와 관련 있는 옛 터’라는 뜻의 글자를 새기고, 네 면에 비문을 새겼다. 비문은 김시온의 손자 김태중(1649-1711)과 가깝게 교유했던 이재(1657-1730)가 1717년에 지었고, 글씨는 안동 출신의 학자이자 문신인 김성일(1538-1593)의 5대손인 김성월(1659-1745)이 썼다.
비각 오른쪽에는 김태중이 김시온을 기리기 위해 1679년에 세운 정자인 송정(경상북도 문화재자료)이 있다.
참고자료
- 숭정처사 유허비, 디지털안동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andong.grandculture.net/andong/toc/GC02400825 -> 김시온(金是榲, 1598~1669)은 자는 이승(以承)이며, 호는 표은(瓢隱)이다. 참봉을 지냈으며 명나라에 대한 절의를 상징하는 숭정처사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도연(陶淵)에 은거하여 산천을 즐기면서 후학을 양성하였으며, 영조 때는 사헌부집의에 증직되었다. / 화강암으로 된 사면 비이다. 좌대(座臺)는 직육면체로 윗면에 연화문, 옆면에 안상(眼象)을 새겼다. 비신 사면에는 돌아가며 비문을 기록하였는데, 제액(題額)은 전면의 중앙에 길이 17㎝ 정도의 큰 글자를 종서로 썼으며, 그 양쪽으로 비문의 서두와 말미가 새겨져 있다. 이수(螭首)는 윗면을 호형(弧形)으로 한 육면체이며 구름무늬가 가득 새겨져 있다. / 비문 전문 수록
- 김시온,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9672
- 김시온, 디지털안동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andong.grandculture.net/andong/toc/GC02401297
- 김덕현, 「임하구곡의 은거문화」, 『안동학연구』 제16집, 한국국학진흥원, 2017. https://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07609936 -> 김진의 증손 표은瓢隱 김시온金是榲(1598-1669)이다. 반변천 상류의 낙연은 김시온이 병자호란의 치욕 뒤 절의를 지키는 처사의 은거지로 세상에 알려지고, 이름도 김시온의 호 도연陶淵으로 바뀌었다. 표은은 청계의 종손宗孫으로 1636년(인조 14) 청태종이 우리 강산을 유린하자, 안동의 선비들이 일으킨 의병의 부장副將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죽령에 이르렀을 때 인조의 항복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귀향하였다. 나라가 위기에 의병으로 떨쳐 일어난 것은 종조부 김성일, 아버지 김철金澈(1569-1616), 숙부 김용 등이 이어온 의리정신으로 가문의 전통이다. 국치에 통분한 표은은 낙연 입구의 옥병봉을 속세와 인연을 끊는 고개로 삼겠다는 뜻으로 격진령隔塵嶺으로 부르고, 와룡산 아래에 ‘와룡초당’을 짓고 은거하였다. 호를 표은瓢隱 또는 도연陶淵이라 했는데, 모두 은거하는 사람을 뜻한다. ‘표瓢’는 낙연의 지형이 표주막 모양으로 입구가 좁고 안이 넓은 은거지의 모양이고, 도연은 도연명陶淵明을 상징하여 역시 은자를 뜻한다. 김시온은 자신의 정사 대표정사大瓢精舍에 부치는 글에서 “낙연 가에 와룡초당을 짓고, 산에서 잣을 줍고 강에서 는 고기를 낚으며, 주역을 공부하고 글씨를 쓰면서 사니, 이에 비할 참된 즐거움이 없으며 살아갈수록 세상만사의 허망함을 알겠다”고 했다. 세상에서는 김시온의 높은 충절을 기려서, ‘숭정처사崇禎處士’로 불렀다. 1734년(영조 10) 조정에서는 그의 절의를 표창하여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를 증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