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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암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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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원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2년 7월 23일 (토) 18:35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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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암정사
구암정사,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구암정사
한자 龜巖精舍
주소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구미리 358-359번지 산144
지정(등록) 종목 경상북도 기념물 제94호
지정(등록)일 1994년 4월 16일
분류 유적건조물/인물사건/인물기념/사우
수량/면적 3,611㎡(3필)
웹사이트 구암정사,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귀암정사는 조선 시대의 학자인 김근(金近)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정조 19년(1795)에 지은 정사이다. 김근은 귀미리에 터를 잡아 정착하였으며, 인조 20년(1642)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을 하지 않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김근이 정착한 후 귀미리에는 의성 김씨 후손들이 대대로 살게 되었다.

김근의 6대손 김굉(金㙆)은 김근을 기리기 위해 정조 15년(1791)부터 4년에 걸쳐 사당, 강당, 동재와 서재 등 여러 건물을 마련하였다. 나중에 서원으로 승격할 것을 생각하면서 건물을 배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창호 가운데에 문설주*가 있는데, 이는 임진왜란 이전의 방식으로서, 조선 시대 초기의 건축 양식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경내에는 정문과 정사, 그리고 사당인 영모사(永慕祠)가 남아 있다. 정사에는 대청을 중심으로 양옆에 온돌방이 있고, 사당은 담장을 둘러 별도의 영역으로 구분하였다.

이곳에서 서남쪽으로 100여m 떨어진 곳에는 김근이 살던 집터에 세워진 생담정사(경상북도 문화재자료)가 있다.


  • 문설주: 문짝을 끼워 달기 위하여 세운 기둥

영문

영문 해설 내용

구암정사는 조선시대의 학자인 김근(1579-1656)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1795년에 지어졌다.

김근은 안동 출신으로 1642년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을 하지 않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귀미리에 정착하였으며, 이후 의성김씨 후손들이 귀미리에 대대로 살게 되었다.

김근의 6대손 김굉(1739-1816)은 김근을 기리기 위해 1791년부터 4년에 걸쳐 사당, 강당, 동재와 서재 등 여러 건물을 지었다. 후에 서원으로 승격할 것을 생각하면서 건물을 배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지어진 건물의 창호 가운데에는 문설주가 있는데, 이는 조선시대 초기의 건축 양식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현재 경내에는 정문, 정사, 사당인 영모사만 남아 있다. 정사는 대청을 중심으로 양옆에 온돌방이 있고, 사당은 담장을 둘러 별도의 영역으로 구분하였다.

구암정사에서 서남쪽으로 100여 m 떨어진 곳에는 김근이 살던 집터에 세워진 생담정사(경상북도 문화재자료)가 있다.

  • 구암정사 vs 귀암정사 - 어느 표기로 할 것인지 안동시청에 확인 중. 현재 국가문화유산포털에는 '구암정사'로 되어 있음.

참고자료

  • 구암정사,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2333700940000&pageNo=1_1_1_1 -> 의성 김씨로 처음 이곳에 터전을 잡아 살기 시작한 김근(1579∼1656)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사당이다. 5대에 걸쳐 양양, 진성, 안망 등지를 옮겨다니던 생활을 청산하고, 광해군 7년(1615) 그의 나이 37세 때 터를 잡아 후손들이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선생은 인조 20년(1642) 진사시에 합격한 뒤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그를 가리켜 정현광 선생은 ‘유림노성(儒林老成)’이라 칭찬하였다. 그 뒤 후손인 김굉이 주도하여 정조 15년(1791)부터 4년에 걸친 공사 끝에 사당 건물을 비롯하여 동재·서재와 강당을 20여칸 규모로 마련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사당 건물인 영모사와 정사 2채만 남아 있다.
  • 구암정사, 디지털안동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andong.grandculture.net/andong/toc/GC02400760 -> 귀와(龜窩) 김굉(金宏)이 오우당 김근의 학덕을 기리고자 건립을 추진하여 1791년 재사를 세우고, 1793년 별묘를 구성하였으며, 1795년(정조 19) 전체를 완공하였다. 구암정사는 홑처마 팔작지붕집으로 바로 뒤에 정면 3칸, 측면 1칸의 사당이 있다. 총 20여 칸의 규모로 묘우(廟宇)는 영모사(永慕祠), 동재는 치각(致慤), 서재는 양정(養正), 강당은 강수(講修)라 이름하였다. 기단은 35㎝ 높이로 자연석을 쌓은 다음, 그 위에 자연석 주초를 놓고 원주와 각주를 세웠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모두 8칸 집으로 중앙 4칸은 마루이고, 좌우에 2칸의 온돌방이 있다.
  • 효와 후학의 정사(精舍), 안동의 생담정사와 귀암정사_181217, 겨울섬, 개인 블로그, 2018.12.20. https://gotn.tistory.com/620 -> 정면 4칸, 측면 2칸의 정사가 자리잡아 강학(講學)의 공간을 형로, 대청 전면에는 두리기둥을 세우고 주두 위에 무익공의 소로를 수장한 굴도리집인데, 가구는 견실한 5량가구로 종보 위에 제형 판대공을 세워 마루도리를 받게 하였습니다. / 정사(精舍)의 마루인 중당을 강수재(講修齋)라고 하고, 동쪽의 방을 양정재(養正齋), 서쪽 방을 치각재(致慤齋)라 각각 이름 하였습니다.
  • 김근, 디지털안동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andong.grandculture.net/andong/toc/GC02401262 -> 1623년(인조 1)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파방되었고 1642년에 다시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관리로 임용되지 못하였다. 일찍이 현재의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귀미리 생담에 손수 송(松)·죽(竹)·매(梅)·국(菊)·연(蓮) 등 군자를 상징하는 다섯 가지의 식물을 심어 놓고 오우당(五友堂)이라 부르고는 소요자적하는 은거의 장소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