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석보지
만석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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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만석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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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萬石洑址 |
주소 | 전라북도 정읍시 이평면 하송리 17-1 |
지정(등록) 종목 | 전라북도 기념물 제33호 |
지정(등록)일 | 1976년 4월 2일 |
분류 | 유적건조물/산업생산/농업/관개시설 |
수량/면적 | 일원 |
웹사이트 | 만석보지,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해설문
국문
보는 농사에 사용하기 위해 냇가에 둑을 쌓아 물을 가두어두던 곳이다.
원래 정읍천 상류에는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민보가 있었다. 그런데 조선 고종 30년(1893)에 고부 군수로 부임한 조병갑趙秉甲이 민보 아래에 만석보를 쌓으며 농민들을 강제로 일하게 하였고, 주인의 허락도 없이 큰 나무를 베어 사용하였다. 또한 보를 쌓은 뒤에는 수세水稅* 명목으로 많은 세금을 거두어들였다.
결국 1894년 조병갑의 포악한 정치와 과중한 세금으로 힘들어하던 농민들은 만석보를 헐었다. 이는 동학농민혁명의 발단이 되었으며, 1973년 이곳을 기념하기 위해 사적비를 세웠다.
- 수세: 봇물을 이용하는 대가로 지급하는 돈이나 곡식
영문
Manseokbo Weir Site
This place at the junction of Jeongeupcheon and Taeincheon Streams is the former site of a weir built in 1893 by Jo Byeong-gap (1844-1912), a magistrate of Gobu (present-day Jeongeup area).
Originally, Jeongeupcheon Stream had a weir constructed upstream from here which provided the local farmers with water. When Jo Byeong-gap initiated the construction of a new weir downstream, he exploited the farmers as forced labor and even chopped down large trees without their owner’s permission. After the completion, the magistrate implemented high taxes for the farmers using the water collected in the weir. The people struggling because his corrupt governance and excessive taxation eventually rebelled in 1894 and destroyed the weir. This historic event known as the Gobu Uprising marked the beginning of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a nationwide peasant movement aimed to end to the ruling class’s exploitation and oppression of the people.
Only signs indicating that an earthen embankment was once constructed here is all that remains of Manseokbo Weir. The monument commemorating this place was installed in 1973.
영문 해설 내용
정읍천과 태인천이 합류하는 이곳은 고부(지금의 정읍 지역) 군수 조병갑(1844-1912)이 1893년에 만든 보가 있던 곳이다.
원래 정읍천 상류에는 농민들이 농사에 사용하기 위해 만든 보가 있었다. 그러나 조병갑이 이 보 아래에 새로운 보를 쌓으며 농민들을 강제로 일하게 하였고, 이 과정에서 주변의 큰 나무들을 주인의 허락도 없이 베어 사용하였다. 또한 보가 완성된 이후에는 보에 저장된 물을 사용하는 대가로 많은 세금을 거두어들였다. 결국 조병갑의 포악한 정치와 과중한 세금으로 힘들어하던 농민들은 1894년 민란을 일으키고 만석보를 헐었다. 그리고 이 민란은 지배세력에 의한 수탈과 억압에 반대하는 전국적인 동학농민혁명으로 이어졌다.
지금 이곳에는 둑을 쌓았던 흔적만 남아있다. 1973년 이곳을 기념하기 위해 사적비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