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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강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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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원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2년 6월 25일 (토) 09:56 판 (영문 해설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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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강재
구강재, 성주문화관광.
대표명칭 구강재
한자 龜岡齋
주소 경상북도 성주군 금수면 성주로 1037
지정(등록) 종목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80호
지정(등록)일 1993년 11월 30일
분류 유적건조물/인물사건/인물기념/사우
수량/면적 2동
웹사이트 구강재,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이 건물은 흙으로 쌓은 담장 안에 구강재와 고직사로 구성되어 있다. 구강재는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은 재실이고, 고직사는 구강재를 지키고 관리하던 사람이 살던 건물이다. 구강재에서는 여희림을 모시고 있다. 여희림은 조선 중종 2년(1507) 과거에 급제하였다. 조선 중종 11년(1516년) 고향인 성주로 돌아와 향약*을 시행하였고 그 이듬해 왕자인 복성군의 스승이 되었다.

여희림은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묘 곁에 여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하였다. 그 후 여희림의 아들 여심이 시묘살이 여막을 헐고 그 터에 구강재를 건립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성주댐 건설로 인한 수몰로 1996년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구강재라는 명칭은 풍수지리 측면에서 볼 때, 여희림 아버지의 묘 터가 강에서 놀던 거북이가 알을 낳기 위해 언덕을 오르는 형국이라고 하는 데서 유래한다.

일반적으로 재실의 평면구성은 마루가 중앙에 위치하고 좌우에 온돌방이 배치되는 중당협실형으로 꾸미는데 반해 구강재는 마루가 좌측으로 위치하면서도 온돌방 앞쪽의 툇간도 마치 마루처럼 넓게 되어있다.


  • 향약 : 향약은 향촌사회의 주민들이 지켜야 할 규약으로, 중국 북송 때 처음 만들어졌다. 조선에서는 중기에 전국적으로 향약이 시행되었다.

영문

영문 해설 내용

구강재는 조선시대의 학자인 여희림(1481-1553)의 제사를 지내기 위한 재실이다.

여희림은 문장으로 이름이 나 있었고, 1507년 생원시에 급제한 뒤 여러 학자들과 교유하였다. 1516년 고향인 성주로 돌아와 자치규약인 향약을 시행하였고, 그 이듬해에는 중종(재위 1506-1544)의 왕자인 복성군(1509-1533)의 스승이 되었다.

구강재가 있는 자리는 원래 여희림이 아버지의 묘 곁에 여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하던 곳이다. 그 후 여희림의 아들이 여막을 헐고 그 터에 구강재를 건립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성주댐이 건설되면서 1996년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구강재라는 명칭은 “거북이와 언덕”이라는 뜻으로, 풍수지리 상 여희림 아버지의 묘 터가 강에서 놀던 거북이가 알을 낳기 위해 언덕을 오르는 형국이라고 하는 데서 유래한다.

담장 안에는 구강재와 관리인이 살던 고직사가 있다. 일반적으로 재실의 평면구성은 마루가 중앙에 위치하고 좌우에 온돌방이 배치되는 데, 구강재는 마루가 왼쪽에 있고 오른쪽에 온돌방이 있다. 온돌방 앞쪽에는 넓은 툇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