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 옥천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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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 옥천서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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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성주 옥천서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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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星州 玉川書院 |
주소 | 경상북도 성주군 용암면 대봉5길 33 |
지정(등록) 종목 | 경상북도 기념물 제162호 |
지정(등록)일 | 2009년 7월 6일 |
분류 | 유적건조물/교육문화/교육기관/서원 |
시대 | 조선시대 |
수량/면적 | 1곽/4,378.0㎡ |
웹사이트 | 성주 옥천서원,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해설문
국문
서원은 조선 시대 중기 이후 설립된 유학을 가르치고 뛰어난 성현에게 제사를 올리는 사립 고등 교육기관이었다.
옥천서원은 조선의사(朝鮮義士) 이사룡(李士龍)을 제향하기 위해 조선 숙종 18년(1692), 그가 살았던 곳인 월항면 인촌리 작촌에 충렬사라는 이름으로 처음 건립되었다. 조선 정조 20년(1796)에 사액*된 후 충렬사는 옥천충렬사 또는 옥천서원으로 불려지다가 조선 고종 때(1870)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그 기능이 정지되었으며, 1919년 직계후손들의 집성촌이 있는 현 위치에 옮겨서 다시 지었다.
이사룡은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하여 조선에 지원군을 요청하자 강제로 징발되어 출전했다가 중국의 금주전투[조선 인조 19년(1641년)]에서 순절하였다. 그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이 명나라로부터 받았던 지원을 생각하며 실탄을 넣지 않은 포를 명나라 군대에 쏘다가 발각되어 처형당하였다. 그의 의로운 죽음이 널리 알려져 이후 그는 조선의사로 불리게 되었으며, 특히 조선 정조는 그를 이순신 장군에 버금가는 인물이라 칭송하며 정조 17년(1793)에 성주목사의 관직과 정려*를 내렸다.
- 사액 : 조선시대 왕으로부터 명칭이 적힌 현판과 노비, 서적, 토지 등을 하사받아 그 권위를 인정받는 것을 말한다.
- 정려란 효자나 열녀, 충신 등의 행적을 기념하기 위한 것으로, 나라에서 이를 표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