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두릉구택
2022년 국문집필
기존 국문
이 건물은 동래정씨(東萊鄭氏) 석문공(石門公) 정영방(鄭榮邦)의 지손(支孫)인 현골[縣谷] 정부자(鄭富者)로 알려진 두릉(杜陵) 정원달(鄭源達, 1853~1924)이 1890년에 지은 집이다. 매봉산 줄기의 기슭에 남동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옛 길주현[현 길안]의 관아터로 전해지고 있는 현재의 집터는 예로부터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집 뒤뜰에는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다는 샘물이 있었다. 정원달은 원래 송천동[솔뫼골]에 살다가 길안면(吉安面) 의흥(義興)골로 이사하여 살면서 재산을 불린 뒤 이 곳에 큰 기와집을 지었다.
이 집은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에 지어진 주택으로, 원래 3칸 규모의 대문채가 있었으나 20여년 전에 철거되었고 현재는 정침만이 남아 있다. ‘口’자형 홑처마집이다. 앞면의 양쪽으로 1칸씩이 돌출된 양날개집의 형상이다.
전체적인 평면구성에서는 전통적인 형식을 따르고 있으나, 세부적인 평면이나 문틀구성 등에서는 후기적인 성향을 강하게 풍기는 1800년대 말기의 특징을 고루 갖추고 있다.
수정 국문
초고
이 집은 마을의 부자였던 정원달(鄭源達, 1853∼1924)이 1890년 무렵에 지었다. 정원달은 원래 송천동[솔뫼골]에 살았는데, 길안면(吉安面) 의흥(義興)으로 이사해 재산을 불린 뒤 이곳에 큰 기와집을 지었다고 한다.
집은 ‘ㅁ’자형으로 되어 있고, 건물 정면의 양 끝이 날개처럼 돌출되어 있다. 중문을 기준으로 오른쪽이 사랑채, 왼쪽이 아래채이며, 좌우 날개채와 안채까지 집의 모든 공간이 연결된다. 원래 본채 앞에 대문채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사라져 전하지 않는다.
뒤에 산을 두고 앞에 강이 흐르는 현재의 집터는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은 옛날 길안현의 관아터였다고 전해지며, 집 뒤에는 가뭄이 심해도 마르지 않는 샘물이 있었다고 한다.
- 고택체험 운영중
- 대문채가 사라진 시기가 ‘20여년전’ ‘40여년 전’과 같이 명확하지 않고, 이유도 알 수 없기 때문에 언급하지 않음(복원 계획이 있다고 하나, 아직 정해진 것은 없는 듯함)
1차 수정
두릉구택은 두릉 정원달(杜陵 鄭源達, 1853~1924)이 1890년 무렵에 지은 집이다. 정원달은 ‘현골 정부자’라고 불릴 만큼 재산이 많았다고 한다.
매봉산 산기슭에 남동향으로 서 있는 이 집의 자리는 예로부터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예전에는 이곳에 길안현(吉安縣, 지금의 안동 길안면)의 관아가 있었다고 전해지며, 집 뒤에는 가뭄이 심해도 마르지 않는 샘물이 있었다고 한다.
집은 안채, 사랑채, 아래채가 안마당을 중심으로 ‘ㅁ’자형을 이루고 있다. 원래는 대문채도 있었다고 하나 후대에 철거되었다. 사랑채와 아래채 사이에는 안마당으로 들어서는 중문이 있다. 현재 한옥체험시설로 운영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