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서산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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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원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2년 6월 18일 (토) 09:00 판 (새 문서: =='''2022년 국문집필'''== ===기존 국문=== 이 서원은 조선 영조(英祖) 47년(1771)에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높은 덕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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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국문집필

기존 국문

이 서원은 조선 영조(英祖) 47년(1771)에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높은 덕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당에서 승격된 것이다. 후에 수은 이홍조를 추향하였다. 서원철폐 때 훼철되었던 것을 1962년 후손들이 다시 개원하여 1976년 서원으로 승격시켰다. 현재 목은의 영정과 별본 영정을 보관하고 있다.

건물은 강당, 숭덕사, 내삼문, 강수재, 존양재, 외삼문, 전사청, 주사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뒷편에는 단청으로 채색한 숭덕사가 1m정도의 기단 위에 세워져 있다. 강수재와 존양재는 강당 앞에 대칭으로 배치되어 있다.

수정 국문

초고

서산서원은 고려시대의 유학자 이색(李穡, 1328~1396)을 추모하기 위한 영당(影堂) 서산사(西山祠)에서 시작되었다. 서산사는 지역 유림들에 의해 조선 영조(英祖) 47년(1771) 처음 건립되었으며, 5년 후인 영조 52년(1776)에 서원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고종 5년(1868)에 내려진 서원철폐령으로 폐쇄되었다가, 1962년 후손들이 다시 세우면서 이색의 후손으로 병자호란(1636) 때 의병장으로 나섰던 이홍조(李弘祚, 1595~1660)를 추가로 모셨고, 1976년 서원으로 승격시켰다.

이색은 끝까지 고려에 대한 절의를 지킨 인물로, 고려 공민왕(재위 1351-1374) 때에는 여러 요직을 두루 거쳤고, 대학자로 이름을 날리며 뛰어난 제자들을 길러냈다. 이홍조는 외가가 있는 안동 일직현 소호리(蘇湖里, 현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망호리)에 한산이씨 중 처음으로 정착해 파조(派祖)가 되었다.

서원은 외삼문,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 강당, 내삼문, 사당이 일직선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고, 제사 준비를 위한 전사청이 사당 우측에 자리하고 있다. 관리인이 사용하는 주사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곳에서는 매년 3월과 9월에 제사를 지낸다.

  • 서원 연혁을 작성하기 위한 시점 확인 필요할 듯 ; 특히 이홍조의 배향 시점에 대한 언급이 일치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체크 필요. (이색의 10세손인 수은(睡隱) 이홍조(李弘祚, 1595~1660)를 추가로 모시고 제사를 지내며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해 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쇄되었다가 1962년 후손들이 뜻을 모아 다시 지은 것이다. / 1976년 사림(士林)의 공의로 서원으로 승격하여 목은 선생을 배향하고 선생의 10대손 수은(睡隱) 이홍조(李弘祚, 1595∼1660) 선생을 종향(從享)했다. / 1960년 사림의 공의로 복설하고 서원으로 승격하여 목은 이색을 배향하고, 선생의 10대손인 수은(睡隱) 이홍조(李弘祚)를 종향하였다. )
  • 대칭을 이루며 서 있는 동재와 서재 건물은 외측이 나무벽을 세운 누마루 형식으로 꾸며져 있으며, 근년에 건립한 것이다.
  • 경북 유형문화재 제171호로 지정된 목은영정과 ‘목은문집(牧隱文集)’ 등 고문헌 100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가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하였다.
  • 이홍조는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의 외손자이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 갇힌 인조를 돕기 위해 의병장이 되어 의병을 모집했고, 서울로 향하던 중 항복 소식을 듣고 귀향하였다.

1차 수정

서산서원은 고려시대의 문신이자 학자인 목은 이색(牧隱 李穡, 1328~1396)과 이색의 10대손인 이홍조(李弘祚, 1595~1660)를 기리는 서원이다. 서원은 조선시대에 세워진 사립 교육기관으로, 선현 제향과 교육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서산서원의 역사는 이색을 추모하기 위해 영조 47년(1771)에 세운 서산사(西山祠)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이홍조를 추가로 모셨고, 고종 5년(1868)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62년에 다시 세워졌다.

이색은 고려 공민왕(1351~1374 재위)의 개혁부터 조선의 건국까지 격동의 시대를 거치며 끝까지 고려에 대한 절의를 지킨 인물이다. 여러 요직을 두루 거쳐 재상의 자리에 올랐으며, 대학자로도 이름을 떨쳤다. 조선 건국 후에는 조정에 머물라는 태조(1392~1398 재위)의 권유를 끝내 거절하고 전국을 유람하다가 생을 마쳤다.

이홍조는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의 딸인 어머니와 함께 외가인 하회에 머물며 학문을 익혔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키기도 하였으며, 안동 소호리(지금의 망호리 지역)에 정착하여 한산이씨 수은공파(睡隱公派)의 파조가 되었다.

서원은 외삼문,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 강당, 내삼문, 사당이 일직선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고, 사당 오른편에는 제사 준비를 위한 전사청이 있다.

  • 이홍조를 추가로 배향한 시기와 복설된 시기에 대한 정보가 자료마다 다름. 위 문안은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과 기존 문안의 내용을 기준으로 작성함.
참고자료 이홍조 배향 시기 복설 시기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정확한 연도 기재 안됨. 서원철폐령 이전에 배향. 1962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776년 서원으로 승격되며 배향. 1962년
한국서원연합회 1776년 서원으로 승격되며 배향. 1962년
디지털안동문화대전 정확한 연도 기재 안됨. 서원철폐령 이전에 배향. 1962년
대경일보 기사, 2017.04.18. 1960년 복설 당시 서원으로 승격하며 배향. 1962년
  • 국가문화유산포털과 기존 문안에는 주요 건물 외의 부속 건물로 전사청과 주사가 있다고 하는데, 위성사진으로 봤을 때는 외삼문과 내삼문을 포함하여 총 7동의 건물이 있는 것으로 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