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시은고택
안동 시은고택 Sieun House, Ando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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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안동 시은고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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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Sieun House, Andong |
한자 | 安東 市隱古宅 |
주소 |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우렁길 37-1 (상리리) |
지정(등록) 종목 | 국가민속문화재 제287호 |
지정(등록)일 | 2016년 4월 27일 |
분류 | 유적건조물/주거생활/주거건축/가옥 |
시대 | 조선시대 |
수량/면적 | 건물 1동, 토지 1,775㎡<1필지> |
웹사이트 | 안동 시은고택,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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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국문
2016
이 건물은 예안이씨(禮安李氏) 7세손 이훈(李薰, 1486~1552)의 종택으로 조선 중종(中宗) 20년(1525) 무렵에 세워졌다. 그는 연산군(燕山君) 10년(1504) 생원시(生員試)에 급제하였으나 기묘사화(己卯士禍, 1519)의 참혹함을 보고 나서 벼슬의 뜻을 버리고 낙향하여 이 집을 짓고 살았다.
평지에 자리잡은 남서향집으로 대문채는 없어지고 지금은 ‘口’자형 정침(正寢)만 남아 있다. 정면 7칸, 측면 7칸, 뒷면 5칸 규모의 이 건물은 대청이 좌측에 놓이고 안방이 중앙 쪽으로 나오면서 상방이 대청 앞에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구성은 일반적인 ‘口’자형 주택의 안채가 대청이 중앙에 놓이고 좌우로 상방(上房)과 안방이 대칭적으로 놓여지는 것과 사뭇 다른 것이다. 또한 이 집의 안채와 같은 칸살구성은 안동지방에서 보이는 특이한 유형으로, 대개 18세기 이후에 건축된 건물들에서 보이고 있다.
2022
시은고택은 예안 이씨 7세손 이훈(李薰) 문중의 종택*이다. 이 집은 조선 중종 20년(1525)에 지었다고 하며, 마을의 이름을 따 ‘상리 종택’이라고도 부른다.
이훈과 두 형 이영, 이전은 당시 개혁 정치를 펼치던 조광조 등 사림 세력과 가깝게 교류하였다. 그러나 중종 14년(1519) 기묘사화가 일어나 여러 선비들이 화를 당하자, 벼슬에서 물러나 풍산 우렁골(지금의 상리리와 하리리 지역)에 정착하였다. 이후 이곳에서는 예안 이씨가 500년 이상 대대로 살면서 집성촌을 이루게 되었다. 우렁골에는 예안 이씨 문중과 관련된 건축물들이 여럿 남아 있으며, 시은고택은 그중 가장 이른 시기에 지어진 건물 중 하나이다.
시은고택은 앞쪽 왼편의 사랑채와 오른편의 중문간채**, 그리고 뒤쪽의 안채가 서로 연결되어 ‘口’ 자형을 이루고 있다. 원래 사랑채 왼쪽에 대문채가 있었고 안채 뒤쪽에 사당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일반적으로 안동 지역 ‘口’ 자형 가옥의 안채는 대청이 가운데에 있지만, 이 집은 대청이 왼쪽에 치우쳐 있고 가운데에 안방이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시은고택에서 남쪽으로 약 300m 떨어진 곳에는 이전의 둘째 아들 이홍인 가문의 종택인 충효당(보물)이 있다.
- 종택(宗宅): 가문의 맏이가 대대로 살아온 집
- 중문간채: 중문이 있는 집채
영문
- Sieun House, Andong
2016
This is the head house of the family of Yi Hun (1486-1552), the 7th-generation descendant of the Yean Yi Clan. Yi passed the state examination in 1504, but retired from his official post to come back to his hometown due to the turbulent political situation following the Literati Purge of 1519.
The house is said to have been built around 1525, but its architectural style indicates that it was reconstructed in the 18th century. The layout of the main quarters forms a square shape, and the rear wing of the quarters is composed of a main room at the center and a wooden-floored hall at the left. This type of arrangement is typical of traditional buildings constructed in the Andong area.
영문 해설 내용
2022
시은고택은 예안이씨 7세손 이훈(1489-1552) 문중의 종택이다. 1525년에 지었다고 하며, 이훈의 손자 이진(1555-1628)의 호를 따라 이름이 지어졌다. 마을의 이름을 따 ‘상리 종택’이라고도 부른다.
이훈과 두 형 이영(1482-?), 이전(1486-1529)은 당시 개혁 정치를 펼치던 사림 세력과 가깝게 교류하였다. 그러나 1519년 사화가 일어나 여러 선비들이 화를 당하자, 벼슬에서 물러나 아버지의 외가가 있던 하리리 지역에 정착하였다. 이후 지금의 상리리와 하리리 지역인 우렁골에는 예안이씨가 500년 이상 대대로 살며 집성촌을 이루게 되었다. 우렁골에는 예안이씨 문중과 관련된 건축물들이 여럿 남아 있으며, 시은고택은 그중 가장 이른 시기에 지어진 건물 중 하나이다.
시은고택은 앞쪽 왼편의 사랑채, 오른편의 중문간채, 뒤쪽의 안채가 서로 연결되어 ‘ㅁ’자형을 이루고 있다. 원래 사랑채 왼쪽에 대문채가 있었고 안채 뒤쪽에 사당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일반적으로 안동 지역 ‘ㅁ’자형 가옥의 안채는 대청이 가운데에 있지만, 이 집은 대청이 왼쪽에 치우쳐 있고 그 옆에 안방이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시은고택에서 남쪽으로 약 300m 떨어진 곳에는 이전의 둘째 아들 이홍인(1525-1594) 가문의 종택인 충효당(보물)이 있다.
갤러리
시은고택 배치도[1]
참고자료
- 「안동 시은고택」등 2건 중요민속문화재 지정 및 「안동 풍산류씨 금계재사」 중요민속문화재 지정 예고, 문화재청 보도자료, 2016.04.26. http://www.cha.go.kr/newsBbz/selectNewsBbzView.do?newsItemId=155699766§ionId=b_sec_1&pageIndex=1&strWhere=&strValue=&mn=NS_01_02
- 『2016년도 제2차 민속문화재분과위원회 회의록』, 문화재청, 2016. https://www.cha.go.kr/cop/bbs/selectBoardArticle.do?nttId=29744&bbsId=BBSMSTR_1019&mn=NS_03_03_04 -> 지정 의견 및 조사의견서 제기되어 있어 문안 작성 시 참고함. / 종택은 기묘사화로 안동에 입향한 삼형제(영·전·훈) 중 세째 아들 이훈(李薰, 1489~1552)이 1525년 건립한 것으로 알려지나 명확한 근거는 보이지 않는다.(문화재청 회의록 의견) / 첫째 이영(李英) 예안이씨 사직공파구택, 둘째 이전(李荃) 선생의 곡강정종택과 더불어 안동을 대표하는 안동파 세거지 중 하나로 조선시대 향촌사회의 동향과 연계망을 파악할 수 있는 역사적 가치가 큼.(문화재청 회의록 안동시 의견)
- 상리리 예안이씨 집성촌, 디지털안동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andong.grandculture.net/andong/toc/GC02401163 -> 조선 중기 조광조와 깊은 친분이 있던 이영(李英)·이전(李荃)·이훈(李薰) 삼형제가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여러 선비들이 화를 당하는 것을 보고 벼슬을 버리고 진외증조부(친할머니의 아버지)인 조안도의 별서(別墅)가 있던 풍산읍 하리리에 정착하였다. 그 뒤 이훈이 상리리로 옮겨 와 후손들이 대대로 세거함으로써 집성촌이 이루어졌다.
- 안동 시은고택,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1483702870000 -> 안동 시은고택은 풍산평야의 동쪽에 위치하며 동쪽에 주산을 두고 있으며 예안이씨 7세손 이훈이 기묘사화를 계기로 낙향하여 1525년에 지었다고 함 / 경상북도 안동지역 ㅁ자형 주거평면의 안채영역은 대청이 중앙에 놓이고 좌우에 상방과 안방이 대칭으로 배치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시은고택은 대청이 좌측에 놓이고 안방이 중앙부, 상방이 대청 앞에 위치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음 / 평면 기둥열이 가구구성과 일치하지 않고 자유롭게 구성되며, 안채의 경우 평주의 높이를 고주와 같이 높게 하고, 대청과 방 부분의 가구법을 달리하는 등의 가구 구성은 다른 집과 차별성을 지님/ 유학자 집안으로 조상들이 저술한 문집을 비롯한 고문서들이 상당수 소장되어 있고 문중의 회의가 종택에서 열리는 등 한 문중의 중심을 잡는 종가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어 중요민속문화재로 지정하여 보존할 가치가 있음
- 예안이씨 상리 종택, 디지털안동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andong.grandculture.net/andong/toc/GC02400912 -> 예안이씨 상리 종택은 평지에 자리 잡은 남서향집으로 사랑 마당 앞에 있던 대문채는 없어지고 현재는 ‘ㅁ’자형 정침(正寢)만 남아 있다. 정면 5칸, 측면 7칸 규모로 이루어져 있는데 ‘ㅁ’자형 전면 좌측에 사랑 공간 2칸이 더 달려 돌출되어 있다. 정면의 가운데에 나 있는 중문간(中門間)에 들어서면 안마당 건너서 각기 2칸씩의 안대청과 안방이 가로로 길게 배열되어 있고 앞에는 툇마루를 시설하였다. 일반적으로 안대청은 중앙에 앉아 안마당을 마주하는데, 예안이씨 상리 종택은 안대청이 안방 좌단에 편재되어 있어 특이하다. 안대청 좌측 칸 앞으로는 상방·통래간·고방이 이어져 좌익사(左翼舍)를, 안방 우측에는 부엌·두지·통래간·책방이 앞으로 뻗어 우익사(右翼舍)를 이루고 있다. 좌익사의 고방은 원래 마루를 깐 서고였다고 한다. 중문간 좌측의 사랑 공간은 좌측과 우측에 각기 1.5칸씩의 사랑 대청과 사랑방을 두고 그 앞에 툇마루를 놓았다. 중문간의 우측으로는 마구간·고방·마루가 차례로 배열되어 있다. 건물의 구조 양식은 막돌 초석 위에 안채와 사랑 공간 정면의 주요 위치에만 일부 원주를 사용한 민도리 형식의 5량가구 홑처마집이다. / 안방이 중앙 쪽으로 나오면서 상방이 대청 앞에 위치하고 있다. 이러한 구성은 특히 경상북도 안동 지역에서만 그 유례를 일부 볼 수 있는 특수한 모습이다.
- 시은당, 디지털안동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andong.grandculture.net/andong/toc/GC02400591
- 예안이씨, 디지털안동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andong.grandculture.net/andong/toc/GC02401120 -> 중종 때 이온의 증손 이영이 1519년 기묘사화에 신진사류들이 화를 당하는 것을 보고 동생 이전(李筌)과 이훈(李薰)을 데리고 현재의 풍산읍 하리리로 이거하였다. / 이훈(李薰)은 1534년에 생원시에 올랐고 이진(李珎)은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의 문인으로 임진왜란 때 종군하였다. 이진의 손자 고산(孤山) 이유장(李惟樟, 1625~1701)은 학문과 인품이 높다하여 공조좌랑, 안음현감 등을 제수하였으나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 관련 유적으로 입향조 이훈의 부친인 파조(派祖) 이필간(李弼幹)과 배위 평산신씨를 모신 경덕사, 이진(李珍)을 추모하여 세운 시은당(市隱堂), 이유장(李惟樟)을 배향한 사익당(四益堂), 이유장 신도비 등이 있다.
주석
- ↑ 안동 시은고택」등 2건 중요민속문화재 지정 및 「안동 풍산류씨 금계재사」 중요민속문화재 지정 예고, 문화재청 보도자료, 2016.04.26. http://www.cha.go.kr/newsBbz/selectNewsBbzView.do?newsItemId=155699766§ionId=b_sec_1&pageIndex=1&strWhere=&strValue=&mn=NS_01_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