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안동 시은고택
2022년 국문집필
초고
이 집은 예안이씨 7세손 이훈(李薰‚ 1489~1552)이 조선 중종 20년(1525)에 지었다고 하며, 마을의 이름을 따 '상리 종택'이라고도 부른다.
이훈은 중종 14년(1519)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형 이영(李英)·이전(李荃)과 함께 풍산 지역으로 낙향했고, 이후 이 마을에 들어와 정착하였다.
지금은 ‘ㅁ’자형의 본채만 남아있지만, 본래 대문채, 사당, 방앗간채 등 다른 건물들도 있었다고 한다.
안채 영역은 대청이 왼쪽에 치우쳐 있으며, 오른쪽에 안방이 있고, 왼쪽 앞으로 상방이 이어져 양쪽 날개채로 연결되는 독특한 배치를 보여준다. 이러한 구성은 특히 경상북도 안동 지역의 일부 가옥에서만 볼 수 있는 모습이다. 방과 대청의 대들보 위치를 서로 다르게 한 가구 구성 역시 이 집의 특색이다.
사랑 공간의 대청 상부에 설치되어 있는 벽감은 현재 사당을 대신해 선조들의 신위를 보관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 원래 현재 협문 자리에 대문채(마방, 대문간, 문간방으로 구성)가 있었고, 안대청 뒤편 서쪽에 사당이 있었다고 한다. 사당은 80여년 전에 사라졌고, 지금은 사랑대청 좌측면과 배면 상부에 설치한 벽감이 사당을 대신하고 있다.
- 집에는 가문 선조들의 문집 및 고문서가 상당수 소장되어 있고, 문중 회의가 이루어지는 종택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 첫째 이영(李英) 예안이씨 사직공파구택, 둘째 이전(李荃) 선생의 곡강정종택과 더불어 안동을 대표하는 안동파 세거지 중 하나이다.
- 건립 이후 20세기까지의 건축수리 이력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으며, 1994․1995년(종택 지붕, 미장 등 보수), 1997년(담장 설치), 2003년(측간 개축, 종택 창호보수)에 보수를 했다.
- 삼형제가 풍산으로 낙향한 것은 이곳에 진외증조부(친할머니의 아버지)인 조안도의 별서(別墅)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1차 수정
시은고택은 예안이씨 7세손 이훈(李薰‚ 1489~1552) 문중의 종택이다. 조선 중종 20년(1525)에 지었다고 하며, 마을의 이름을 따 ‘상리 종택’이라고도 부른다.
이훈과 두 형 이영(李英, 1482~?), 이전(李荃, 1486~1529)은 당시 개혁 정치를 펼치던 조광조(趙光祖, 1482~1519) 등 사림 세력과 가깝게 교류하였다. 그러나 중종 14년(1519) 기묘사화가 일어나 여러 선비들이 화를 당하자, 벼슬에서 물러나 아버지의 외가가 있던 풍산 하리 지역에 정착하였다.
이후 풍산 우렁골(지금의 상리리와 하리리 지역)은 예안이씨가 500년 이상 대대로 살며 집성촌을 이루었다. 우렁골에는 예안이씨 문중과 관련된 건축물들이 여럿 남아 있으며, 그중에서도 시은고택은 가장 이른 시기에 건립된 건물 중 하나이다.
시은고택은 앞쪽 왼편의 사랑채, 앞쪽 오른편의 중문간채, 뒤쪽의 안채가 서로 연결되어 ‘ㅁ’자형을 이루고 있다. 원래 사랑채 왼쪽에 대문채가 있었고 안채 뒤쪽에 사당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일반적으로 안동 지역 ‘ㅁ’자형 가옥의 안채에는 대청이 가운데 있지만, 이 집은 대청이 왼쪽에 치우쳐 있고 그 옆에 안방이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시은고택에서 남쪽으로 약 300m 떨어진 곳에는 이전의 둘째 아들 이홍인(李洪仁, 1525~1594) 가문의 종택인 충효당(보물)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