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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 성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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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 성산관
성주 성산관, 성주역사80선, 성주문화관광.
대표명칭 성주 성산관
한자 星州 星山館
지정(등록) 종목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43호
지정(등록)일 1980년 12월 30일
분류 유적건조물/정치국방/궁궐·관아/관아
수량/면적 1동
웹사이트 성주 성산관,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이 건물은 조선시대 지방 관청 건물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성주의 관청 건물은 지금의 성주군청과 성주초등학교에 걸쳐 자리 잡고 있었다. 후대의 기록에 따르면 조선 전기의 관청 건물은 임진왜란 때 모두 불에 타버렸다. 이후 성주에 부임한 여러 수령들이 관청 건물을 다시 지었는데, 이 건물도 그때 지은 것이다.

조선시대 성주의 관청 건물은 일제 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면서 대부분 없어지고 이 건물만이 남았다. 원래 현 군청사 자리에 있었으나 1994년 군청사를 새로 지을 때 현재의 자리로 옮겨 세웠다.

성산관은 성주목*의 객사 명칭이나 이 건물의 용도가 객사의 일부였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객사란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나 대궐을 상징하는 궐패(闕牌)를 모시고 임금에 대한 예를 행하는 장소로서 수령들은 부임하게 되면 먼저 객사에 들려 임금이 계신 대궐을 향해 절을 올렸다. 또한 객사는 외국에서 온 사신들과 공무를 위해 파견된 중앙 관리들이 숙소로 사용하거나 고을의 인사들을 초대하여 연회를 베풀기도 하는 곳이었다.

이 건물은 마루 바닥이 지면에서 높이 올라와 있는 것이 특색으로, 흔히 고상식(高床式)이라 불린다. 이런 구조는 마루를 주로 이용하는 남방건축에서 지면의 습기를 피하기 위해 짓는 방법으로 상주의 양진당에도 같은 구조가 남아 있어 서로 비교가 된다.


  • 성주목: 조선시대 성주는 행정구역상 성주목에 해당하였고, 성주목사가 이를 관할하였다.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성산관은 조선시대 성주목 관아 건물 중 하나이다. 성산관이라는 이름은 성주목 관아 객사의 명칭이지만, 이 건물이 객사의 일부였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객사는 고려와 조선시대에 고을 관아에 설치했다. 객사는 가운데에 왕의 전패를 모신 정청이 있고, 좌우 양쪽에는 공무로 출장 온 관원이나 고을을 찾은 중요한 손님들이 숙소로 사용되던 익헌이 있다. 객사에 모셔진 전패는 왕의 통치권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러한 통치권을 바탕으로 고을 수령과 관리들은 궁궐을 향해 절하는 망궐례를 행했다.

조선시대 성주목 관아의 건물은 지금의 성주군청과 성주초등학교에 걸쳐 자리 잡고 있었다. 조선 전기에 세워진 관아 건물은 임진왜란 때 모두 불에 타버렸다고 한다. 1608년 목사 송영구(1556-1620)가 목사 관사 건물을 다시 지었는데 이 건물도 그때 같이 지었고, 이후 성주에 부임한 여러 목사들이 다른 관아 건물들을 다시 지었다. 성주에 있던 관아 건물들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대부분 파괴되었고 이 건물만이 남았다. 원래 지금의 성주군청 자리에 있었으나 1994년 군청 건물을 지으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웠다.

이 건물은 마루 바닥이 지면에서 높이 올라와 있는 것이 특색이다. 이런 구조는 마루를 주로 이용하는 한국의 남부 지역 건축물에서 지면의 습기를 피하기 위해 짓는 방법이다.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