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죽암서실
안동 죽암서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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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안동 죽암서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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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安東 竹巖書室 |
주소 | 경상북도 안동시 미동길 74-35 (풍산읍) |
지정(등록) 종목 |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609호 |
지정(등록)일 | 2013년 8월 19일 |
분류 | 유적건조물/주거생활/주거건축/가옥 |
수량/면적 | 1동 |
웹사이트 | 안동 죽암서실,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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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국문
죽암서실은 조선 시대의 학자인 김대현(金大賢)이 선조 10년(1577)에 자연을 벗 삼아 학문을 닦기 위해 세웠다. ‘죽암’이라는 이름은 김대현이 젊은 시절에 사용하던 호에서 따 왔다. 죽암서실이 있는 오미리는 풍산 김씨가 대대로 살고 있는 마을이다. 죽암서실은 김대현이 선조 15년(1582) 생원시에 합격한 후 문중 후손들을 가르치기 위한 공간으로 주로 쓰였다.
처음 김대현이 지었던 초가 건물은 사라졌고, 1773년에 후손들이 기와지붕을 올려 새로 지었다. 지금의 건물은 1822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마루를 중심으로 양옆에 온돌방을 배치하였으며, 앞면은 난간을 둘러 누마루*처럼 꾸몄다.
죽암서실은 1910년대에 설립된 오릉학술강습소의 교실로 쓰이기도 하였다. 오릉학술강습소는 풍산 김씨 가문의 청년들이 주축이 되어 운영한 근대식 학교로, 전통 한학 교육과 신식 교육을 겸하여 지역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후 오릉학술강습소는 도림강당과 화수당으로 옮겼고 1925년까지 운영되었다.
- 누마루: 다락처럼 높게 만든 마루
영문
Jugamseosil Study Hall
Jugamseosil Study Hall was established in 1577 by Kim Dae-hyeon (1553-1602), a scholar of the Joseon period (1392-1910), as a place to study while befriending nature. The name Jugamseosil means "Document Room of the Bamboo Rock" and comes from a pen name that Kim Dae-hyeon used in his youth.
Omi-ri Village, where this study hall is located, has been home to many generations of the Pungsan Kim Clan, to which Kim Dae-hyeon belonged. After Kim Dae-hyeon passed the classics licentiate examination in 1582, he used this study hall mainly as a space to teach the descendants of the family. Prior to and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1910-1945), members of the Pungsan Kim Clan, such as Kim Sun-heum (1840-1908) and Kim Ji-seop (1884-1928), used this study hall as a place to resist the Japanese imperial government and promote the independence movement.
The original thatched-roof building fell into disrepair, and in 1773, it was rebuilt as a tiled-roof building by his* descendants. The current building was constructed in 1822. It consists of a wooden-floored room in the center with an underfloor-heated room to each side. Along the front is a wooden veranda with balustrades.
- 여기 his라고만 해도 누구인지 정확히 구분 될까요?
For a short time, Jugamseosil Study Hall was used as a classroom of the Oreung Academic Training School, which was established in the 1910s. The Oreung Academic Training School, led by the youth of the Pungsan Kim Clan family, was a modern school that combined traditional and modern education methods to educate local students.
영문 해설 내용
죽암서실은 조선시대의 학자인 김대현(1553-1602)이 1577년 자연을 벗 삼아 학문을 닦기 위해 세웠다. ‘죽암’이라는 이름은 김대현이 젊은 시절에 사용하던 호에서 따왔다.
죽암서실이 위치한 오미리는 풍산김씨가 대대로 살고 있는 마을이다. 1582년 김대현이 생원시에 합격한 이후 죽암서실은 문중 후손들을 가르치기 위한 공간으로 주로 쓰였다. 조선 말기에는 김순흠(1840-1908), 김지섭(1884-1928) 등 이곳에서 수학한 인물들이 일제에 항거하여 독립운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처음 김대현이 지었던 초가 건물은 세월이 흘러 사라졌고, 1773년 후손들이 기와지붕 건물로 다시 지었다. 지금의 건물은 1822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마루를 중심으로 양옆에 온돌방을 배치하였으며, 앞면은 난간을 둘러 누마루처럼 꾸몄다.
죽암서실은 1910년대에 설립된 오릉학술강습소의 교실로 잠시 쓰이기도 하였다. 오릉학술강습소는 풍산김씨 가문의 청년들이 주축이 되어 운영한 근대식 학교로, 전통 한학교육과 신식교육을 겸하여 지역 학생들을 가르쳤다.
참고자료
- 오미동 도림강당 항목 참조 -> 김대현은 성리학의 대가인 성혼(1535-1598)의 제자로 1582년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을 일으켜 민심을 수습하는 데 기여하였다.
- 배영동, 『(경북의 종가문화) 청백정신과 팔련오계로 빛나는, 안동 허백당 김양진 종가』, 예문서원, 2016, 124~125쪽. -> 죽암서실의 원래 이름은 죽암정사였다. 김대현이 1577년 초가로 창건해 학문을 연마하고 후진을 가르치던 곳이다. 그 후 몇 차례 개축되었다.
- 안동 죽암서실,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3413706090000 -> 안동 죽암서실은 산 아래 마을에서 아침저녁으로 밥 짓는 연기가 산허리를 휘감고 있는 경관과 산 능선 너머 풍산들과 낙동강의 먼 경관을 즐길 수 있는 곳에 터를 잡았고, 서실 주변은 대나무와 바위가 감싸고 있는 독특한 경관을 갖고 있다. 죽암서실은 풍산김씨의 씨족마을 오미리 배후에 위치한 의식영역으로서 후학을 양성하고 학문을 닦고 자연경관을 만끽할 수 있는 곳으로, 정면과 배면의 중앙 기둥 상부 초각 두공 짜 맞춤은 서실 건축에서 보기 드문 모습이며, 가구 부재 및 기다 구조재는 매우 양호한 상태다.
- 강학의 현장과 학문의 특징, 허백당 문중 http://www.poongsankim.com/htmls/pungkim-n001-4.htm -> 죽암서실은 유연당 휘 대현이 오미동 죽암산에 건립한 정사이다. 유연당은 선조 9년(1576) 오미동 종택을 중수 이건하고, 다음해 유연당이 나이24세때 초가삼간으로 죽암정사를 건립했다. 유연당은 이곳에서 학문을 수학하여, 선조 15년 나이 29세에 생원시에 합격했다. 유연당은 나이 36세에 영주 봉향리에 유연당을 건립하여 이주했고, 두 번에 걸쳐서 영주 이산서원장을 역임했다. 당시 유연당의 부친인 화남 농은 서울 장의동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향년 58세로 세상을 떠날 당시 유연당은 38세, 학호 김봉조는 19세, 망와 김영조는 14세, 장암 김창조는 9세, 심곡 김경조는 7세, 광록 5세였다. 이것을 통해서 볼 때, 유연당의 자제들은 서울 장의동, 풍산 오미동, 영주 봉향리 등지에서 어린시절 조부 화남공과 부친 유연당의 훈도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초가로 지어진 죽암서실은 오랜 세월을 견디지 못하고, 폭우와 산사태로 흔적도 없이 파손되었고, 1822년 유연당의 10대손 김노흠과 그의 족숙 김중우 공이 6칸의 기와로 지금의 서실을 중건했다고 한다. 죽암서실은 양쪽에 양몽재와 시습재라 편액한 별채가 딸려 있는데, 이곳은 주로 문중 자제들을 위한 독서 공간으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조선 후기 오미동 풍산김씨 후손들은 주로 이곳에서 학문을 수학했고, 또 많은 인물들이 양성되었다. 특히 죽암서실은 일제침략에 항거한 죽포 김순흠, 추강 김지섭, 김만수 같은 인물을 배양했으며, 3.1운동 시절에는 오릉강습소가 이곳에 개원되어 유서 깊은 역사의 현장이 되기도 했다.
- 근대교육의 요람지 오릉학술강습소, 디지털안동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andong.grandculture.net/andong/toc/GC024C020302 -> 1917년 무렵 오미리에도 근대교육의 물결이 밀려들었는데, 그 출발은 오릉학술강습소이다. 오릉학술강습소는 김헌섭(金憲燮)의 발기로 창설되었으며, 초대교장은 김병택(金秉澤)이었다. 설립 당시에는 지금의 죽암서실에 교사를 마련하였다가 이후 도림강당으로 옮겼으며, 그런 다음 현재의 화수당(오릉학술강습소)으로 이건하였다. 오릉학술강습소에서는 보통과정(지금의 초등과정)을 가르쳤던 것으로 추측되는데, 주로 마을 내의 풍산김씨 일문이 주축이 되어 교육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간혹 문중직(文重稙)이나 조재건(趙在建)과 같이 타성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오미리에서 근대식 학교를 설립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김응섭과 김지섭, 김병필 등의 노력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들 모두 1908년 3월 15일 재경영남인사들이 창립한 교남교육회(嶠南敎育會)에 참여하여 교육구국운동을 전개하였던 인물이다. 특히 김응섭과 김병필은 교남교육의 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는데, 이는 오미리에 근대교육의 단초를 마련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 안동의 문화재, 죽암서실(竹巖書室), 겨울섬, 개인 블로그 https://gotn.tistory.com/1154 -> 사진 상세 / 죽암서실(竹巖書室)에 대한 자료는 빈약한 편으로, 숭재일록(崇齋日錄)에 1863년에 황손(璌孫)과 원촌(遠村) 이영옥(李英玉)형이 죽암서실(竹巖書室)로 거처를 옮겨 자리를 잡았다는 내용과, 당내(堂內)의 장로(長老) 및 갈전(葛田) 안지평장(安持平丈)도 함께 죽암서실(竹巖書室)에서 회의한 기록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