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행중

황윤석 생가

HeritageWiki
강혜원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2년 4월 21일 (목) 10:33 판 (새 문서: {{진행중}} {{문화유산정보 |사진=황윤석생가.jpg |사진출처=[http://www.newsinjb.com/news/articleView.html?idxno=6031 고창군, 조선 후기 대표 실학자 이재...)

(차이) ← 이전 판 | 최신판 (차이) | 다음 판 → (차이)
이동: 둘러보기, 검색


황윤석 생가
대표명칭 황윤석 생가
한자 黃胤錫 生家
주소 전라북도 고창군 성내면 조동리 353번지
지정(등록) 종목 전라북도 민속문화재 제25호
지정(등록)일 1986년 9월 9일
분류 유적건조물 / 인물사건 / 인물기념 / 탄생지
웹사이트 황윤석 생가,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이 집은 조선후기 실학의 대가로서 이재난고(頤齋亂藁)라는 방대한 기록을 남긴 이재(頤齋) 황윤석(1729~1791)이 태어난 곳이다. 그의 부친 황전(黃壥)은 이 집을 지으면서 만은재(晩隱齋)라고 이름을 지었다. 황윤석은 30세 이후 병치레가 잦고 이따금 말실수를 하자 《주역》 〈산뢰이괘(山雷頤卦)〉에 따라 ‘말을 삼가며 음식을 절제한다’는 의미로 이 집의 이름을 ‘이재’라고 고치고 자신의 호로 삼았다. 그의 다른 호인 산뢰도 이재와 같은 뜻이다.

1909년 일본군이 의병을 토벌할 때, 이곳은 안채를 빼고 모두 불타서 그해에 사랑채, 곳간채, 문간채를 다시 지었다. 안채는 앞면 7칸, 옆면 2칸의 규모가 큰 초가집이다. 평면은 일자형으로 전형적인 남부지방 가옥 형태이다. 안채의 대청 북쪽 툇간에는 붙박이 뒤주와 그 뒤주 뒷벽에 조상의 위패를 모신 벽감*이 있는데 이것은 다른 한옥에서 보기 드문 특징이다. 원래 조상의 위패는 안채 뒤편에 있던 사당에 모셨으나 화재 이후 복원하지 않고 안채에 벽감을 마련해 모셨다. 한편 곳간채는 5칸으로 바닥에는 모두 마루를 깔아 알곡을 그대로 갈무리할 수 있게 되어 있다. 대문채는 1970년 철거되었으나, 2003년 복원을 위한 시굴 조사를 시행하여 2022년에 복원했다.

황윤석은 벼슬살이했던 10년을 제외하면, 일생을 이 집에서 학문에 힘써 이재난고 등 수많은 저서를 남기고 별세하였다.


  • 벽감 : 벽면을 오목하게 파서 만든 공간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