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이한규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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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국문집필

기존 국문

없음.

수정 국문

초안

조선시대의 무관 이한규(李漢珪, 1622~1729)의 무덤으로, 부인 안동권씨와의 합장묘이다.

이한규는 숙종 2년(1676)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영조 4년(1728)에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는 데에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는 조선의 4대 임금 세종(世宗, 재위 1418~1450)의 아들인 화의군 이영(和義君 李瓔, 1425~1489)의 후손으로, 그가 부천 지역에 정착한 이후부터 일대에 그의 후손들이 세거하게 되었다.

봉분 주위에는 12간지를 새긴 보호석을 둘렀고, 앞에는 묘비, 상석, 혼유석, 장명등 1기, 망주석 1쌍, 문인석 1쌍 등의 석물을 세웠다. 비문은 정조 4년(1780) 증손자 이문덕(李文德)이 지은 것이다.

묘는 본래 경기도 양주에 있었는데, 영조 19년(1743) 그의 후손들이 지금의 자리로 이장하였다고 한다.

  • 경상남도 진주 촉석루의 표정사 공원 논개사당 뒤편에 그의 선덕을 기려 세워진 선덕비가 있다.
  • 장명등은 일본인이 훔쳐가려던 것을 빼앗아 세워 놓았다고 한다. 묘역에 사당이 있었는데 소실되었고, 하마비는 도굴되어 없어졌다고 한다.
  • 이한규는 부천 일대에 세거하는 전주이씨 화의군파의 입향조로 여겨진다.(디지털부천문화대전 참조)

1차 수정

조선시대의 무신 이한규(李漢珪, 1622~1729)와 부인 안동권씨의 합장묘이다.

이한규는 조선 제4대 왕 세종(1418~1450 재위)의 아홉째 아들인 화의군(和義君, 1425~?)의 6대손이다. 숙종 2년(1676) 무과에 급제하였고 여러 관직을 두루 지냈다. 무관임에도 항상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고, ’장수가 되는 도(道)는 명을 받는 날에 그 집안을 잊어야 하고, 진영을 방비하기로 약속함에 임하여서는 그 어버이를 잊어야 하며, 북채를 두드리면 자기 자신을 잊어야 한다.’며 군관들을 격려하였다.

이한규의 묘는 본래 경기도 양주에 있었는데, 영조 19년(1743) 전주이씨 화의군파 후손들이 지금의 자리로 묘를 옮겼다.

봉분 아랫부분에 돌을 둘렀는데, 이러한 형태는 조선 전기에 유행한 양식이다. 돌에는 12간지를 나타내는 동물을 새겼다. 묘 앞에는 묘비, 제물을 차려 놓는 상석, 혼이 나와 노닌다는 혼유석, 한 쌍의 돌기둥인 망주석, 불을 밝히는 장명등, 문인 모양의 문인석을 갖추었다. 묘비의 비문은 정조 4년(1780) 증손자 이문덕(李文德)이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