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행중

산수정

HeritageWiki
강혜원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2년 3월 21일 (월) 10:11 판

이동: 둘러보기, 검색


산수정
산수정,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산수정
한자 山水亭
주소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마애길 70-31 (마애리)
지정(등록) 종목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122호
지정(등록)일 2000년 9월 4일
분류 유적건조물/주거생활/주거건축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1동
웹사이트 산수정,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기존 국문

이 건물은 조선 선조(宣祖)와 광해군(光海君) 연간에 관직을 수행한 호봉(壺峯) 이돈(李燉, 1568~1624)이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마애에 돌아와 학문에 정진하고 후진을 가르치기 위해 지은 정자이다.

그의 본관은 진성(眞城)이며, 선조 3년(1601)에 문과에 급제하고 사헌부지평, 예조정랑을 지냈으며 영해부사로 좌천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1610년에 산수정을 지은 것으로 전해진다. 오랜 세월이 흘러 건물이 퇴락하였지만, 동야(東埜) 김양근(金養根, 1734~1799)이 쓴 상량문(上樑文)이 남아있어 1780년에 중건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최근에도 보수한 흔적이 남아있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 지붕으로 툇마루 전면 3칸에 모두 난간을 설치하였다.

수정 국문

초고

산수정은 조선시대의 학자 이돈(李燉, 1568-1624)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온 후 가문의 후손들과 지역의 자제들을 가르치기 위해 광해군 4년(1612)에 지은 정자이다.

이돈은 선조 34년(1601) 과거에 합격했고, 광해군 2년(1611) 경상도 영해부사로 좌천당하자 사직한 후 귀향해 이로당과 산수정을 짓고 10여 년 동안 후학을 양성했다. 이후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영천 군수로 부임했으나, 이듬해에 병으로 죽었다.

세월이 흘러 퇴락한 건물을 정조 4년(1780)에 중건했으며, 김양근(金養根, 1734~1799)이 쓴 상량문(上樑文)을 통해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있다.

건물은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두었고, 건물 전면에 시설한 툇마루는 바닥을 살짝 띄우고 난간을 둘러 누각의 느낌이 나도록 꾸몄다.

정자는 낙동강이 바라다 보이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마애리는 진성이씨 중 안동에 처음 들어 온 이자수(李子修)가 처음 정착했던 곳이자, 진성이씨 후손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이다.

  • 건물이 최근에도 보수되었다(기존 문안) -> 언제인지 확인 필요.(검색 안됨)
  • 정자의 건립 시점을 ‘1610년 경’으로 적었으나, 이돈의 행적 및 안동 이로당의 설명을 참고하면 1612년으로 보아야 타당함.
  • 이돈은 한강 정구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선조 34년(1601) 과거에 합격했다. 광해군 2년(1611) 정인홍을 논척하다가 좌천되자 사직 후 귀향하였고, 1623년 부모 봉양을 위해 영천 군수로 부임해 이듬해에 죽었다. (고전종합 DB 제공 문집 해제 內 행력 참조)
  • 툇마루 양 끝에 나무판으로 된 문을 달아 출입문의 기능을 하게 했다.

1차 수정

산수정은 조선시대의 학자 이돈(李燉, 1568-1624)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온 후 가문의 후손들과 지역의 자제들을 가르치기 위해 광해군 4년(1612)에 지은 정자이다. 산수정이 위치한 마애리는 고려 말의 문신인 이자수(李子修)가 정착한 뒤 진성이씨 후손들이 대대로 모여 사는 집성촌이다.

이돈은 선조 34년(1601) 과거에 합격한 뒤 여러 관직을 지냈다. 광해군 2년(1611) 경상도 영해부사로 좌천되자, 벼슬에서 물러난 뒤 고향으로 돌아와 산수정과 이로당(문화재자료)을 짓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정자 안에는 조선시대의 문신 김양근(金養根, 1734~1799)이 쓴 상량문이 남아있으며, 이를 통해 정조 4년(1780)에 중건했음을 알 수 있다. 정자는 대청을 중심으로 양옆에 온돌방을 두었고, 앞쪽의 툇마루는 바닥을 살짝 띄우고 난간을 둘러 누각의 느낌이 나도록 꾸몄다. 툇마루 양 끝에는 나무판으로 만든 문을 달아 출입문으로 사용하였다.

참고자료

  • 산수정, 디지털안동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andong.grandculture.net/andong/toc/GC02400811 -> 산수정은 조선 선조와 광해군 연간에 관직을 역임한 호봉(壺峰) 이돈(李燉, 1568~1624)이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마애마을로 돌아와 학문 정진과 후배 양성에 전념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처음에는 명칭을 ‘통승려’라고 하였다가 얼마 후 산수정으로 고쳤다. 동야(東埜) 김양근(金養根, 1734~1799)이 쓴 상량문으로 보아 건립 이후 건물이 퇴락하자 18세기에 중건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돈은 본관이 진성(眞城)이며 훈련참군(訓練參軍) 이흥양(李興陽)의 현손으로, 1601년(선조 34)에 문과에 급제하고 사헌부지평, 사간원헌납, 예조정랑 등을 지냈으나 헌납으로 있을 때 정인홍(鄭仁弘)을 논척하다가 영해부사로 좌천되었다. 1612년(광해군 4)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안동으로 돌아온 이후 산수정을 지은 것으로 전해진다. / 건물은 방형 대지의 중앙에 놓았고, 그 주위를 토담으로 돌려 일곽을 이루게 하였으며, 정면과 배면 담장에 출입문인 사주문과 일각문을 내었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집으로, 앞줄 3칸 모두에는 개방적인 정자 건축의 기능을 고려한 듯 마루를 시설하였고, 그 뒷줄에는 가운데 마루 1칸을 두었으며, 양측에 각각 1칸씩의 온돌방을 배열했다. 두 온돌방의 앞면에는 쌍여닫이 띠살창을 내고, 측면에는 중인방 바로 위에 광창을 설치하였다. 중앙 마루와 온돌방 사이에는 필요할 때 문짝을 들어 올려 공간을 확장할 수 있는 2분합 들어열개문이 달려 있다. 정면의 마루 앞은 난간으로 장식하여 정자 건축의 멋을 더해주고 있다. 건물의 구조 양식은 자연석 기단 위에 막돌 초석을 놓았고, 정면 기둥만 원주를 사용한 홑처마 팔작지붕집이다. 정면과 양 측면의 앞쪽 칸은 소로로 수장하여 그 격을 높이고 나머지는 간략하게 꾸민 민도리 형식이며, 상부 가구는 5량가로 대들보 위에는 판대공이 종도리를 받고 있다.
  • 마애촌 이야기, 진성이씨 대종회 – 사진자료실 http://www.jinseong.org/ -> 이 건물은 조선 선조 광해 년간에 관직을 수행한 호봉(壺峯) 이돈(李燉)이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마애에 돌아와 학문에 정심하고 후진을 가르치기 위해 지은 정자이다. 풍산읍 동남쪽에 있는 마애마을의 아래쪽에서 낙동강과 마애 절벽을 바라보며 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정자는 1610년경에 지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동야 김양근이 쓴 상량문이 남아 있다. 최근에 보수한 흔적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납도리 오량가구의 팔작기와집이다. 가운데 마루를 배치하고 양쪽에 각각 1칸의 온돌방을 꾸몄다. 정자 좌우에는 판문을 달았으며 전면 기둥은 원주를 사용하고 기타 기둥은 각주를 사용하였다. 정자 사방에는 담장을 둘렀는데 정자와 너무 가까워 답답한 느낌을 주고 있으며 출입문은 전면과 후면에 모두 만들었다. 이돈(1568∼1624)의 본관은 진성(眞城)이며 호는 호봉이고 자는 광중(光中)이다. 1601년 문과에 급제하고 사헌부지평, 예조정랑을 지냈으나 영해부사로 좌천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산수정을 지었다. 인조 반정 후 영천군수에 제수되어 관직에 나가 주민의 칭송을 받았으나 1년 뒤에 관아에서 죽었다. 저서로는 『호봉집』 2권을 남겼다.
  • 『호봉집』, 한국문집총간 해제, 한국고전종합DB. https://db.itkc.or.kr/dir/item?grpId=hj#/dir/node?grpId=hj&dataId=ITKC_MI_0774A
  • 산수정:경북 안동시 풍산읍 마애리 92(마애길 70-31), 일소일빈, 다음 블로그, 2019.11.11. https://blog.daum.net/thddudgh7/16566819

-> 내부 사진(2019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