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유옹주 묘
화유옹주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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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화유옹주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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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和柔翁主墓 |
주소 | 경기도 부천시 오정구 여월동 산 32 |
지정(등록) 종목 | 부천시 향토유적 제7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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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기존 국문
화유옹주(和柔翁主, 1740~1777)는 조선의 왕족으로, 영조의 10녀이며 어머니는 귀인 조씨이다. 1740년(영조 16년) 9월 29일, 영조와 숙원조씨(淑媛趙氏, 귀인조씨)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1752년(영조 28년) 10월 5일, 호조참판(戶曹參判) 황자(黃梓)의 아들인 창성위(昌城尉) 황인점(黃仁點)과의 혼인이 결정되었으나, 그해 11월 화협옹주가 사망하자 영조는 화유옹주의 길례를 중지할 것을 명하였고, 14살이 된 1753년(영조 29년) 2월 27일, 황인점과 혼인하여 2년 후 출궁하였다. 이후에도 영조는 여러 차례 화유옹주의 저택에 친림하였고, 1777년(정조 1년) 5월 21일, 38세의 나이에 졸하였다.
화유옹주의 태비와 태실은 충청남도 당진군 순성면 성북리 태봉산에 있었으나, 현재는 충청남도 당진군 순성초등학교 교정에 위치하고 있다.
묘역은 본래 부천시 작동 산126번지에 곡장(曲墻)을 두르고 옥개형 묘비와 혼유석, 상석, 향로석 등을 갖추고 있었으나, 1991년 6월 부천시 작동 산28-6번지로 이장하였고, 다시 2005년 6월 부천시 여월동 산32번지로 이장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91년 6월 이장 발굴조사에서 장신구와 도자기류, 생활용품 등 궁중과 반가의 유물 30여점이 출토되었고, 현재는 서울시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과 부천시립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출처 : 부천시 향토문화재 지정 자료(2021.7.28.)
수정 국문
조선의 21대 임금 영조(英祖, 재위 1724~1776)의 10번째 딸 화유옹주(和柔翁主, 1740~1777)의 무덤이다.
화유옹주는 숙원 조씨(淑媛 趙氏, 훗날의 귀인 조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영조 29년(1753) 황인점(黃仁點, 1732~1802)과 혼인하여 2년 후 출궁하였다.
봉분은 남편 황인점과의 합장묘이다. 본래 묘역은 작동 126번지에 있었는데, 1991년 도로를 확장하면서 작동 산 28-6번지로 이장하였고, 석물 없이 봉분만 남아 있었던 것을 2005년 6월 지금의 자리로 다시 이장하면서 봉분을 감싸는 낮은 담장을 두른 지금의 모습으로 정비하였다.
현재 봉분 앞에는 묘표, 혼유석, 상석, 향로석 등의 석물이 세워져 있고, 묘역을 표시하는 망주석 1쌍은 무덤 오른쪽에 나란히 있는 어머니 귀인조씨의 묘(향토유적 제6호)와 영역을 공유하고 있다.
한편, 첫 번째 이장을 위해 실시한 발굴조사에서 부부가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장신구와 도자기류, 생활용품 등의 유물 30여 점이 출토되었다. 이때 수습된 유물들은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부천시립박물관 내의 부천향토역사관에 복제품이 전시되어 있다.
- 영조의 여러 딸 중 정조가 즉위한 직후 궁에 출입할 수 있었던 옹주는 화유옹주 뿐이었다고 한다.
- 화유옹주의 태비와 태실은 충청남도 당진군 순성면 성북리 태봉산에 있었으나, 현재는 충청남도 당진군 순성초등학교 교정에 위치하고 있다.
1차 수정
영문
참고자료
- 부천 황인점, 화유옹주 묘 / 화유옹주의 어머니 귀인 조씨의 묘 / 신생옹주 묘와 함께 주목해 볼 역사의 현장, 김희태의 ‘이야기가 있는 역사여행’,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bogirang/221810964918 → 이장 과정에서 화유옹주의 유물이 출토되어 부천향토역사관에서 복제품의 형태로 만날 수 있다. / 현장 사진 있음.
- <화유옹주 유물전> 2월 민속박물관서, 연합뉴스, 1992.1.29.https://news.naver.com/main/read.naver?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3590363 → 화유옹주는 영조의 열번째 딸이자 昌城尉 황인점의 부인으로 이번 전시회에는 화유옹주와 황인점이 살아있을때 사용하던 비녀류, 도자류, 백자그릇류, 등잔구류 등 31점의 유물들이 선보인다. 이들 유물들은 지난 해 6월 경기도 부천시 중구 일대 도로확장공사로 인한 분묘이장 작업중 황인점과 화유옹주 무덤에서 나온 부장품들로 그의 8대 종손이 문화재로 기증, 전시회가 열리게 된 것.
- <참고> [조선왕실의 취향] 공주의 옥잔에 장식된 용… 술 마시면 죽는 벌레가 되다, 한국일보, 2020.6.13.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2006101916740216 → 화유옹주 묘는 옹주의 남편인 창성위(昌城尉) 황인점(黃仁點ㆍ?~1802)과의 합장묘이므로, 부장품의 하한시기를 1777년부터 1802년까지로 볼 수 있다. 옥잔을 비롯한 분채병, 녹색유리병, 청화백자잔 등 부장품의 일부는 청나라에서 제작되어 청나라를 자주 다녀왔던 남편 황인점에 의해 청 황실의 증여 또는 사행무역을 통해 조선에 유입되었다고 추정되는 것들이다. 황인점은 1776년(정조원년)부터 1793년까지 사신의 신분으로 총 여섯 차례 청나라 수도에 방문하였는데, 두 점의 옥잔은 청 황실로부터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된다.
- <참고>『조선왕조실록』 정조 1년(1777) 5월 21일자 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va_10105021_001 → 화유 옹주(和柔翁主)가 졸(卒)하였다. 옹주는 영묘(英廟)의 귀인(貴人)인 조씨(趙氏)의 소출로 창성위(昌城尉) 황인점(黃仁點)에게 하가(下嫁)하였다. 하교하기를, “선조(先朝)의 옹주 가운데 금달(禁闥:궁중의 합문. 을 출입한 사람은 단지 이 옹주 하나 뿐이었는데 뜻밖에 상사(喪事)가 났으니, 나의 슬픈 마음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하고, 동원 비기(東園秘器)141) 와 단주(鍛紬)·미두(米豆)·전포(錢布)로 상구(喪具)를 돕고 녹봉(祿俸)은 3년을 한정하여 그대로 지급하라고 명하였다. / 영조는 후궁들을 통해 12명의 옹주를 얻었는데, 그 중 조씨의 첫 딸을 포함해 5명은 일찍 죽어 봉작을 받지 못했다. 정조가 즉위했을 때 다른 옹주들을 죽었거나 [화순옹주(맏딸, 1750년에 죽음), 사도세자의 누나 화평옹주(1748년에 죽음), 화협옹주(1752년에 죽음), 화길옹주(1772년 죽음)], 죄인의 신분이 되어 [화완옹주(사도세자 정적, 정조 즉위 후 서인으로 강등), 화령옹주(폐숙의 문씨 소생)] 궁에 출입할 수 있는 옹주는 화유옹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