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규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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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규 묘
작성자 심자, [ https://blog.naver.com/simjy0/222603830053 향토문화재 제4호 이한규 묘], 심자의 톡톡, 네이버 블로그.
대표명칭 이한규 묘
한자 李漢珪 墓
주소 경기도 부천시 오정구 여월동 산55번지
지정(등록) 종목 부천시 향토유적 제4호



해설문

기존 국문

이한규의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자는 내숙(來叔)이다. 아버지는 전주이씨 화의군(和義君)의 5세손인 이상지이다. 세종의 9남인 화의군 이영(李瓔)을 중시조로 하는 화의군의 후손이 부천 지역에 정착한 것은 영조 때이다. 즉 화의군의 6세손인 이한규 묘가 경기도 양주에서 부천시 여월동으로 이장되면서부터이다. 이한규는 1676년(숙종 2) 무과에 급제하여 내외 관직을 거치고 아장(亞將) 및 정헌대부형조판서지중추부사겸오위도총관(正憲大夫刑曹判書知中樞府事兼五衛都摠管) 등을 지냈다. 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 재직 때에는 선덕을 기려 경상남도 진주 촉석루의 표정사 공원에 선덕비가 있다. 선덕비는 진주 논개사당 뒤편에 세워져 있다. 1728년(영조 4) 영남에 난적이 창궐했을 때 왕의 친위병을 이끌고 남하하여 난적의 무리 가운데로 들어가 평정하였으며, 이듬해 68살을 일기로 타계하여 숭정대부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되었고, 양주에서 장사를 지냈다가 1743년(영조 19) 여름 현재의 위치로 이장하였다.

(출처 : 향토문화전자대전)


수정 국문

조선시대의 무관 이한규(李漢珪, 1622~1729)의 무덤으로, 부인 안동권씨와의 합장묘이다.

이한규는 숙종 2년(1676)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영조 4년(1728)에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는 데에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는 조선의 4대 임금 세종(世宗, 재위 1418~1450)의 아들인 화의군 이영(和義君 李瓔, 1425~1489)의 후손으로, 그가 부천 지역에 정착한 이후부터 일대에 그의 후손들이 세거하게 되었다.

봉분 주위에는 12간지를 새긴 보호석을 둘렀고, 앞에는 묘비, 상석, 혼유석, 장명등 1기, 망주석 1쌍, 문인석 1쌍 등의 석물을 세웠다. 비문은 정조 4년(1780) 증손자 이문덕(李文德)이 지은 것이다.

묘는 본래 경기도 양주에 있었는데, 영조 19년(1743) 그의 후손들이 지금의 자리로 이장하였다고 한다.

  • 경상남도 진주 촉석루의 표정사 공원 논개사당 뒤편에 그의 선덕을 기려 세워진 선덕비가 있다.
  • 장명등은 일본인이 훔쳐가려던 것을 빼앗아 세워 놓았다고 한다. 묘역에 사당이 있었는데 소실되었고, 하마비는 도굴되어 없어졌다고 한다.
  • 이한규는 부천 일대에 세거하는 전주이씨 화의군파의 입향조로 여겨진다.(디지털부천문화대전 참조)


1차 수정

영문

참고자료

  • 이한규 묘, 디지털부천문화대전 http://bucheon.grandculture.net/bucheon/toc/GC01601154
  • 입향성씨, 디지털부천문화대전 http://bucheon.grandculture.net/bucheon/toc/GC01601408 → 전주이씨는 5개 파가 세거하고 있는데, 이옥(李沃)관련항목 보기·이성의(李成義)를 입향조로 하는 효령대군파, 이경(李經)을 입향조로 하는 임영대군파, 이양·이병덕을 입향조로 하는 밀성군파, 이한규(李漢珪)를 입향조로 하는 화의군파, 이명인·이종응(李種應)을 입향조로 하는 덕흥대원군파가 있다. 전주이씨 이외에 이시진을 입향조로 하는 여주이씨, 이형신을 입향조로 하는 덕수이씨도 있다.
  • (부천) 형조판서 이한규(李漢珪) 묘-전주이씨-, 개미실 사랑방,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roaltlf/221441918343 → 묘역 사진 상세.
  • 향토문화재 제4호 이한규 묘, 심자의 톡톡,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simjy0/222603830053 → 이미지 출처(작성자명 심자, 게시일 2021년 12월 24일) // 부인 안동 권씨와 합장묘로 비문은 1780 (정조4년)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를 지낸 증손 이문덕이 지었다. / 장명등은 일본인이 훔쳐가는 것을 빼앗아 세워놓았으나 묘역에 있던 사당은 소실되었고 하마비는 도굴되어 없어졌다
  • <참고> 화의군,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화의군 → 세종의 여섯째 아들이자 서장자이며, 계유정난 당시 수양대군(세조)에 맞선 육종영 중 한 사람이다. 성종대에 방면되었으나 종친의 지위를 박탈당하였다가 중종대에 복권되었다. / 1425년(세종 7년) 9월 5일, 세종(世宗)과 당시 궁인이었던 강씨(姜氏, 영빈 강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사육신 등의 왕위 복위 거사가 일어났을 때 세조가 화의군에게 묻기를 “성삼문을 파직 처리함이 옳지 않으냐.”는 물음에 화의군은 묵묵부답함으로써 전라도 금산(錦山)에 어머니 강씨와 함께 유배되었다. / 언제 사망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1489년(성종 20년) 화의군은 자신의 서자를 종적에 편입시켜줄 것을 호소하였다. 화의군의 행적에 관한 기록은 이 기록이 마지막이기 때문에 적어도 1489년 이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 세종의 자녀들 중 가장 장수하였고, 제일 마지막에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