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가대(부산진성)
영가대 永嘉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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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안내판: 부산진성 |
해설문
국문
1614년(광해군 6) 경상도 순찰사 권반이 부산진성의 전선을 감추기 위해 해자를 파서 호에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퍼 올린 흙이 쌓여 작은 언덕이 생겼는데, 이곳에 망루를 겸해 누각을 세웠다. 1617년(광해군 9) 임진왜란과 장유재란 당시 잡혀간 조선인을 데려오기 위해 일본으로 파견된 회답 겸 쇄환사 오윤겸이 이곳에서 용왕에게 안전 항해와 무사 귀환을 비는 ‘해신제(海神祭)’를 올린 후 일본으로 출발하였다. 이를 계기로 그후 일본에 파견되었던 통신사행의 바닷길은 이곳에서 해신제를 지내고 출발하게 되었다. 이 건물의 세워질 당시 이름은 알 수 없으나 1624년(인조 2) 일본 사절을 접대하기 위해 파견 온 선위사 이민구가 권반의 고향인 안동의 옛 이름(영가)을 따서 ‘영가대(永嘉臺)’라 하여 그 이름이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영가대의 원래 위치는 지금의 동구 범일동 성남초등학교 서쪽 경부선 철로변이었다. 그러나 부산진-동래온천 간 전차선로 부설과정에서 헐리게 되자 1917년 일본인 실업가 오이케 타다스케〔大池忠助〕가 매입하여 그의 별장 능풍장(陵風莊)으로 옮겨 졌다가, 1966년 도시화 과정에서 철거되었다고 한다.
영가대의 규모나 구조와 관련하여『부진제영(釜鎭題詠)』의 「영가대기(永嘉臺記)」에서는 8칸 규모의 작은 누각이라 하였으나, 조선후기 각종 그림자료에서는 정면 6칸, 측면 1칸 등 규모나 벽체 구조가 서로 다르게 그려져 있다. 2003년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로 자성대공원 남쪽에 복원되었으나, 일제강점기 사진에 의하면 정면 3칸, 측면 4칸의 규모에 팔작지붕으로 벽체가 있는 건물임을 알 수 있다.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영가대는 부산진성에 세워졌던 누각이다. 조선시대 국왕의 명으로 일본에 파견된 외교사절이 이곳에서 출발하고 도착하였으며, 무사 항해를 기원하기 위해 해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기도 하다.
원래 위치는 지금의 범일동 성남초등학교 서쪽 경부선 철로변이었다. 1614년 경상도 순찰사 권반(1564-1631)이 부산진성에 있던 전투용 선박을 감추기 위해 해자를 파고 선착장을 만들었는데, 이 과정에서 파낸 흙이 언덕을 이루자 그곳에 망루를 겸해 누각을 세운 것이다. 처음 세워질 당시의 이름은 알 수 없고, 1624년 권반의 고향인 안동의 옛 이름 ‘영가’를 따서 영가대라 하였다.
1617년에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포로로 잡혀간 조선인을 데려오기 위해, 오윤겸(1559-1636)을 비롯한 외교사절이 일본으로 파견되었다. 이때 안전 항해와 무사 귀환을 비는 해신제를 이 누각에서 올린 후 일본으로 출발하였다. 이를 계기로 그후 일본에 파견되었던 조선 외교사절의 바닷길은 이곳에서 해신제를 지내고 출발하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17년 부산진-동래온천 사이에 전차선로를 놓는 과정에서 영가대가 헐리게 되자, 한 일본인 실업가가 매입하여 자신의 별장으로 옮겼고, 1966년 도시화 과정에서 철거되었다고 한다. 현재의 누각은 2003년에 자성대공원 남쪽에 다시 지은 것이다.
갤러리
참고자료
- 영가대, 부산역사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busan.grandculture.net/Contents?local=busan&dataType=01&contents_id=GC04200096
- 류승훈의 부산 돋보기 - 조선 통신사이ㅡ 랜드마크, 영가대, 부산일보, 2016.04.06. http://www.busan.com/view/busan/view.php?code=20160407000045
- 부산 영가대 사진, 팬저의 국방여행, 2021.05.30. http://panzercho.egloos.com/11388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