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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정처사 유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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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정처사 유허비
숭정처사 유허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숭정처사 유허비
한자 崇楨處士 遺墟碑
주소 경상북도 안동시 길안면 구수리 174
지정(등록) 종목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61호
지정(등록)일 1985년 8월 5일
분류 기록유산/서각류/금석각류/비
수량/면적 1기
웹사이트 숭정처사 유허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기존 국문

이 비는 병자호란을 개탄하며 와룡산(臥龍山)의 도연(陶淵) 위에 와룡초당(臥龍草堂)을 짓고 은거했던 표은(瓢隱) 김시온(金是榲, 1598~1669)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당초 이 비는 도연폭포 곁에 있었으나 1987년 임하댐 건설로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표은은 명나라에 대한 절의를 상징하는 숭정처사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이 유허비는 화강석으로 된 사면비(四面碑)이며, 전면에는 ‘숭정처사유허(崇禎處士遺墟)’라고 썼다. 비좌대는 직육면체로 윗면에 연화문을 측면에 안상을 새겼다. 비신 4면에 돌아가며 비문을 기록하였다. 용모양의 비머리(螭首)는 윗면을 호형으로 한 육면체이며 구름무늬가 가득 새겨져 있다. 현재 이 비는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비각 안에 보존되어 있다. 비문은 밀암(密菴) 이재(李栽)가 찬(撰)하고 표은의 증손인 성월(聖鉞)이 썼다

수정 국문

초고

이 비석은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 이후 와룡산(臥龍山)에서 은거했던 선비 김시온(金是榲, 1598~1669)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18세기에 세워졌다.

김시온은 전쟁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해 한양으로 향했는데, 도중에 인조(仁祖, 재위 1623~1649)의 항복 소식을 듣고는 통곡하며 귀향하였다. 이후 그는 와룡산의 도연(陶淵) 폭포 근처에 초당을 짓고, 스스로를 명나라에 대한 절의를 지키는 ‘숭정처사(崇禎處士)’라 칭하면서 벼슬에 나가지 않고 후학을 양성하였다.

비석은 사각형의 받침돌, 몸돌, 구름 문양을 새겨 장식한 머릿돌로 이루어져 있다. 비석 전면 중앙에 ‘숭정처사유허(崇禎處士遺墟)’라고 새기고, 비석의 네 면을 둘러 비문을 기록했다.

비문은 김시온의 손자 김태중(金泰重, 1749~1711)과 가깝게 교유했던 이재(李栽, 1657~1730)가 숙종 43년(1717)에 지었고, 글씨는 김시온의 증손자 김성월(金聖鉞, 1659~1745)이 썼다.

이 비석은 본래 그가 머물던 도연폭포 곁에 있었는데, 1987년 임하댐 건설로 인해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 현재 비석의 보호를 위해 지어진 비각 안에 있다.

  • 비석이 세워진 시점 & 비각 건립 시점 명확하지 않음(검색 안되므로 확인 필요함)
  • 비석 우측에 김태중이 조부인 김시온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송정(松亭,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2호)이 있다.
  • 김시온의 호 도연은 중국의 시인으로 은거하는 삶을 살았던 도연명(陶淵明)의 이름을 따서 지은 호이다. 그는 자신이 은거하던 곳의 지형이 표주박 모양을 하고 있어 스스로 ‘표은(瓢隱)’이라는 호를 짓기도 하였다. / 영조 10년(1734)에 조정에서 김시온의 절의를 기리며 벼슬을 내렸다.
  • 김시온의 장남 김방렬의 아들이 김태중이다. 김성탁은 김태중의 장남이다. / 이재는 갈암 이현일의 아들이며, 김태중은 이현일에게서 수학했다.


1차 수정

참고자료

  • 숭정처사 유허비, 디지털안동문화대전 http://andong.grandculture.net/andong/toc/GC02400825 -> 김시온(金是榲, 1598~1669)은 자는 이승(以承)이며, 호는 표은(瓢隱)이다. 참봉을 지냈으며 명나라에 대한 절의를 상징하는 숭정처사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도연(陶淵)에 은거하여 산천을 즐기면서 후학을 양성하였으며, 영조 때는 사헌부집의에 증직되었다. / 화강암으로 된 사면 비이다. 좌대(座臺)는 직육면체로 윗면에 연화문, 옆면에 안상(眼象)을 새겼다. 비신 사면에는 돌아가며 비문을 기록하였는데, 제액(題額)은 전면의 중앙에 길이 17㎝ 정도의 큰 글자를 종서로 썼으며, 그 양쪽으로 비문의 서두와 말미가 새겨져 있다. 이수(螭首)는 윗면을 호형(弧形)으로 한 육면체이며 구름무늬가 가득 새겨져 있다. / 비문 전문 수록
  • <참고> 김덕현,「임하구곡의 은거문화」, 『안동학연구 제16집』, 한국국학진흥원, 2017. -> 김진의 증손 표은瓢隱 김시온金是榲(1598-1669)이다. 반변천 상류의 낙연은 김시온이 병자호란의 치욕 뒤 절의를 지키는 처사의 은거지로 세상에 알려지고, 이름도 김시온의 호 도연陶淵으로 바뀌었다. 표은은 청계의 종손宗孫으로 1636년(인조 14) 청태종이 우리 강산을 유린하자, 안동의 선비들이 일으킨 의병의 부장副將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죽령에 이르렀을 때 인조의 항복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귀향하였다. 나라가 위기에 의병으로 떨쳐 일어난 것은 종조부 김성일, 아버지 김철金澈(1569-1616), 숙부 김용 등이 이어온 의리정신으로 가문의 전통이다. 국치에 통분한 표은은 낙연 입구의 옥병봉을 속세와 인연을 끊는 고개로 삼겠다는 뜻으로 격진령隔塵嶺으로 부르고, 와룡산 아래에 ‘와룡초당’을 짓고 은거하였다. 호를 표은瓢隱 또는 도연陶淵이라 했는데, 모두 은거하는 사람을 뜻한다. ‘표瓢’는 낙연의 지형이 표주막 모양으로 입구가 좁고 안이 넓은 은거지의 모양이고, 도연은 도연명陶淵明을 상징하여 역시 은자를 뜻한다. 김시온은 자신의 정사 대표정사大瓢精舍에 부치는 글에서 “낙연 가에 와룡초당을 짓고, 산에서 잣을 줍고 강에서 는 고기를 낚으며, 주역을 공부하고 글씨를 쓰면서 사니, 이에 비할 참된 즐거움이 없으며 살아갈수록 세상만사의 허망함을 알겠다”고 했다. 세상에서는 김시온의 높은 충절을 기려서, ‘숭정처사崇禎處士’로 불렀다. 1734년(영조 10) 조정에서는 그의 절의를 표창하여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를 증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