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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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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2년 3월 1일 (화) 00:53 판 (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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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서원
서산서원,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서산서원
한자 西山書院
주소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원리 산9번지 외 7필
지정(등록) 종목 경상북도 기념물 제43호
지정(등록)일 1983년 9월 29일
분류 유적건조물/교육문화/교육기관/서원
수량/면적 22,176㎡
웹사이트 서산서원,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기존 국문

이 서원은 조선 영조(英祖) 47년(1771)에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높은 덕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당에서 승격된 것이다. 후에 수은 이홍조를 추향하였다. 서원철폐 때 훼철되었던 것을 1962년 후손들이 다시 개원하여 1976년 서원으로 승격시켰다. 현재 목은의 영정과 별본 영정을 보관하고 있다.

건물은 강당, 숭덕사, 내삼문, 강수재, 존양재, 외삼문, 전사청, 주사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뒷편에는 단청으로 채색한 숭덕사가 1m정도의 기단 위에 세워져 있다. 강수재와 존양재는 강당 앞에 대칭으로 배치되어 있다.

수정 국문

초고

서산서원은 고려시대의 유학자 이색(李穡, 1328~1396)을 추모하기 위한 영당(影堂) 서산사(西山祠)에서 시작되었다. 서산사는 지역 유림들에 의해 조선 영조(英祖) 47년(1771) 처음 건립되었으며, 5년 후인 영조 52년(1776)에 서원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고종 5년(1868)에 내려진 서원철폐령으로 폐쇄되었다가, 1962년 후손들이 다시 세우면서 이색의 후손으로 병자호란(1636) 때 의병장으로 나섰던 이홍조(李弘祚, 1595~1660)를 추가로 모셨고, 1976년 서원으로 승격시켰다.

이색은 끝까지 고려에 대한 절의를 지킨 인물로, 고려 공민왕(재위 1351-1374) 때에는 여러 요직을 두루 거쳤고, 대학자로 이름을 날리며 뛰어난 제자들을 길러냈다. 이홍조는 외가가 있는 안동 일직현 소호리(蘇湖里, 현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망호리)에 한산이씨 중 처음으로 정착해 파조(派祖)가 되었다.

서원은 외삼문,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 강당, 내삼문, 사당이 일직선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고, 제사 준비를 위한 전사청이 사당 우측에 자리하고 있다. 관리인이 사용하는 주사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곳에서는 매년 3월과 9월에 제사를 지낸다.

  • 서원 연혁을 작성하기 위한 시점 확인 필요할 듯 ; 특히 이홍조의 배향 시점에 대한 언급이 일치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체크 필요. (이색의 10세손인 수은(睡隱) 이홍조(李弘祚, 1595~1660)를 추가로 모시고 제사를 지내며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해 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쇄되었다가 1962년 후손들이 뜻을 모아 다시 지은 것이다. / 1976년 사림(士林)의 공의로 서원으로 승격하여 목은 선생을 배향하고 선생의 10대손 수은(睡隱) 이홍조(李弘祚, 1595∼1660) 선생을 종향(從享)했다. / 1960년 사림의 공의로 복설하고 서원으로 승격하여 목은 이색을 배향하고, 선생의 10대손인 수은(睡隱) 이홍조(李弘祚)를 종향하였다. )
  • 대칭을 이루며 서 있는 동재와 서재 건물은 외측이 나무벽을 세운 누마루 형식으로 꾸며져 있으며, 근년에 건립한 것이다.
  • 경북 유형문화재 제171호로 지정된 목은영정과 ‘목은문집(牧隱文集)’ 등 고문헌 100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가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하였다.
  • 이홍조는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의 외손자이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 갇힌 인조를 돕기 위해 의병장이 되어 의병을 모집했고, 서울로 향하던 중 항복 소식을 듣고 귀향하였다.

1차 수정

참고자료

  • 서산서원, 디지털안동문화대전 http://andong.grandculture.net/andong/toc/GC02400695 -> 1771년(영조 47) 이색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영당(影堂)인 서산사(西山祠)로 건립되었다. 이색의 10세손인 수은(睡隱) 이홍조(李弘祚, 1595~1660)를 추가로 모시고 제사를 지내며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해 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쇄되었다가 1962년 후손들이 뜻을 모아 다시 지은 것이다. 1976년 유림의 공의로 서산서원으로 승격되었다. / 건물은 명교당, 숭덕사, 내삼문, 강수재, 존양재, 외삼문, 전사청, 주사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강당인 명교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정면 5칸 중 중앙 3칸을 대청으로 하였고, 양측 칸은 통간의 온돌방으로 꾸몄다. 대청 뒤쪽 판벽에는 매 칸 중앙에 양개판문을 달았는데, 문틀 아래 윗면 중앙에 중간창설주를 세웠던 홈이 문틀에 남아 있다. 근년에 판문을 새로 만들고 문틀에 나무를 덧대어 보수하는 과정에서 중간창설주를 뽑아버린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러한 2연 독창 형식의 흔적이 1700년대 건물에 남아 있는 예는 흔치 않다. 강당 뒤편에 단청한 내삼문과 토석 담장으로 둘러싸인 숭덕사는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사당으로서 높이 1m 가량의 축대를 쌓은 뒤에 세운 초익공계의 5량가 건물이다. 강수재 및 존양재는 강당 앞면에 대칭으로 배치된 동재와 서재에 해당하는 건물인데, 그 평면도 대칭으로 구성되어 있다. 강당 쪽으로 2통칸의 온돌방과 툇마루가 병렬로 꾸며져 있고, 외측 2칸은 누마루 형식으로 되어 있는 건물로 근년에 건립한 것이다.
  • 서산서원,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VdkVgwKey=23,00430000,37&pageNo=1_1_1_0 -> 이 서원은 조선 영조 47년(1771)에 세웠다. 이색의 10대손인 이홍조를 추가로 모시고 제사를 지내며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해 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쇄되었다가 1962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경내 건물로는 사당과 강당 등 주요 건물과 동재·서재, 제물을 준비하여 두던 전사청과 관리인의 숙소인 주사 등 부속시설이 있다.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해마다 3월과 9월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 서산서원, 안동관광 http://www.tourandong.com/public/sub4/sub4.cshtml?seq=553&page=10&searchKey=0&search= -> 조선영조 47년(1771)에 목은(牧隱) 선생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목은영당(牧隱影堂)인 서산사(西山祠)를 세웠고, 1976년 사림(士林)의 공의로 서원으로 승격하여 목은 선생을 배향하고 선생의 10대손 수은(睡隱) 이홍조(李弘祚, 1595∼1660) 선생을 종향(從享)했다. 묘우인 숭덕사는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맞배지붕으로 이색 영정을 보관하고 있으며 이색을 주향(主享)으로 하고, 이홍조의 위패를 봉안했다. 강당인 명교당은 서원의 각종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 강론 장소로 사용되는데, 가운데 마루를 두고 양옆에 협실을 배치하였다. 향사 때에 동북쪽 방은 대신(臺臣)들이 사용하고 서쪽 방은 유사들과 집례, 축관이 사용하였다. 향사 때 사용하는 제물은 장만하여 전사청에 보관하였다. /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고종 5)에 훼철되었다가 1962년에 후손들이 복원하였다.
  • [한국정신문화의 원류, 書院을 찾아서], <12>정신문화의 1번지, 안동의 서원 … 서산서원(西山書院), 대경일보, 2017.4.18. https://www.dk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107850 -> 경북 안동시 일직면 원리에 있는 서원이다. 1771년(영조 47년) 지방유림의 공의로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목은영당(牧隱影堂)인 서산사(西山詞)를 세웠고, 1868년(고종 5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1960년 사림의 공의로 복설하고 서원으로 승격하여 목은 이색을 배향하고, 선생의 10대손인 수은(睡隱) 이홍조(李弘祚)를 종향하였다. 서원에서는 3월과 9월 중정(中丁)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1983년 경북기념물 제43호로 지정되었다. / 조선 중기문신이자 의병장, 수은(睡隱) 이홍조(李弘祚)(1595-1660) ; 이홍조 관련 연혁 (1595년(선조 28년) 전라도(全羅道) 함열(咸悅)출생이다. 조부는 이대형(李大馨), 부친은 찰방을 지낸 해산(海山) 이문영(李文英), 어머니는 풍산류씨(豊山柳氏)로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의 딸이다. / 8세 되던 해에는 모친을 따라 외가인 안동 하회에 가서 외조부 서애 류성룡에게 글을 익혔다. 이후 13세부터는 막내 외숙인 수암(修巖) 류진에게 본격적으로 배우며 학문과 덕행을 익혀 나갔다. 인조반정 이후 몇 차례 향시에 합격했으나 한양에서 치르는 성시에는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 1636년(인조 14년) 43세 때 병자호란이 터져 인조가 남한산성에 포위되자 안동 인사들의 추대로 의병장이 되어 의병을 모집하였다. 서둘러 의병을 이끌고 길을 재촉하는 도중 참판 전식(全湜)이 영남의병대장이 되어 문경고을에 머물고 있음을 듣고 문경으로 달려갔다. 함께 군사를 모의하고 의병을 격려하고서 남한산성을 향해 행군을 서두를 즈음 적에게 항복하여 남한산성의 포위가 풀렸음을 듣고 군사를 해산하고 돌아왔다. / 이홍조는 경상도 안동부 일직현 소호리(蘇湖里, 현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망호리)에 자리를 잡아 수은공파(睡隱公派, 일명 안동소호리파)의 시조가 되어 후손들이 안동에서 번창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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